뮤지컬 'HOPE'는 프란츠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를 두고 30년간 재판을 이어 간 에바 호프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창작 뮤지컬이다. 알앤디웍스 제공
HOPE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
김선영 차지연 고훈정 조형균 등 출연
극본 강남 연출 오루피나 작곡 김효은

유대계 독일인 소설가인 프란츠 카프카(1883~1924)가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건 그가 사망한 후였다. 사후 그의 작품이 재평가되며 실존주의 문학 선구자로 불렸고, 미발표 원고는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유작 ‘소송’ ‘아메라카’ ‘성’은 모든 원고를 태워달라던 유언을 따르지 않았던 친구 막스 브로트에 의해 세상에 나왔다. 브로트는 자신의 비서 에스더 호프와 함께 카프카의 미완성 작품과 편지 등도 보관했다. 브로토가 숨진 후 원고를 간직해 온 에스더 역시 자신의 두 딸에게 원고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 이후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은 에스더의 딸 에바 호프에게 카프카 원고 반환 소송을 제기하며 지난한 재판이 시작됐다.

이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접한 강남 작가와 김효은 작곡가는 ‘그들에게 원고란 무엇일까’라는 궁금증을 바탕으로 뮤지컬을 만들었다. 뮤지컬 ‘HOPE’는 실제 사건의 틀을 빌려왔지만 극 중 인물과 상황은 새롭게 재구성했다. 평생 원고만을 지켜 온 에바 호프와 카프카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가 요제프 클라인, 그의 친구 베르트 등이 등장한다. 누가 원고 소유의 정당성을 갖고 있느냐 하는 싸움이 아닌, 그 원고가 무엇이길래 호프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원고를 지켜왔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주관하는 아르코 한예종 뮤지컬 창작아카데미에서 출발한 ‘HOPE’는 2018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됐다.

78세 노파 에바 호프와 소설가 요제프의 원고를 의인화한 캐릭터 K가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알앤디웍스 제공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캐릭터의 매력

에바 호프는 ‘이 동네 미친 여자’로 불리는 78세 노파다. 30년 째 이어지는 재판에도 굴하지 않고 원고가 자신의 것이라 주장한다. 노인을 연기하는 배우 김선영, 차지연의 연기가 자연스러워 감정 이입을 높인다. 호프가 원고를 처음 접하게 되는 8세 과거와 젊은 시기까지는 차엘리야, 이예은, 이윤하가 연기해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작품에 몰입을 돕는다.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발발, 유대인 수용소, 노파 호프의 누추한 공간, 재판장까지 다양한 시공간을 오가며 호프의 세상으로 관객을 이끈다.

극에서 가장 독창적인 캐릭터는 원고를 의인화한 K다. 쓰여졌지만 한 번도 읽히지 않은 원고다. 그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은 인생의 주인공을 대변하는 K는 그래서 에바 호프 그 자체와 겹쳐보이기도 한다. K는 누구에게도 관심 받지 못한 호프의 인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본 친구 같은 존재로 호프의 진정한 행복을 바라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낡아 헤진 소매와 옷깃으로 K가 오랫동안 보관해 온 원고임을 드러내는 섬세한 표현이 돋보인다.

재판장의 판사, 검사, 기자 등 앙상블 배우들은 동시에 요제프 클라인과 그의 친구 베르트가 된다. 베르트의 부탁으로 원고를 맡게된 호프의 엄마 마리, 실제 사건과는 무관하게 새로이 만들어진 전쟁 난민인 카델까지 무대 위에서는 6인의 배우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다. 현재 법정 장면과 과거 인물들이 교차해 자칫 복잡하고 지루해질 수 있었던 서사를 영리하게 풀어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호프가 모든 걸 잃은 뒤 자신에게 남은 건 원고밖에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마리처럼 원고에 집착하게 됐다는 흐름에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다.

복잡할 수 있는 서사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지루하지 않게 풀어내며 한 인물의 생애를 따라가는 뮤지컬 'HOPE'는 두 작가와 작곡가의 데뷔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완성도가 높다. 알앤디웍스
완성도 높은 음악과 무대활용

‘HOPE’는 뮤지컬 ‘록키호러쇼’, ‘마마돈크라이’ 등을 연출한 오루피나 연출가가 연출했다. 최신식 기술을 활용하거나 무대효과를 많이 주지 않는 대신 배우와 안무를 활용해 무대를 부족함 없이 활용했다. 주로 영상이나 무대 세트로 표현되는 열차를 조명을 들고 걸어 들어오는 배우들의 몸짓으로 표현하는 등 가장 단순한 방법으로 빚어낸 효율적인 연출력이 돋보인다.

신진 창작자인 강남 작가와 김효은 작곡가의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완성도가 높다. 넘버들은 리듬이나 박자가 복잡하지 않고 가사와 장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에 충실해 어렵지 않다. 그러면서도 멜로디가 아름다워 귓가에 맴돈다. 각 넘버마다 많은 화성을 쌓아 각각의 특성을 지니는 동시에 극 전체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통일성도 지닌다. 드럼 없이 현악 4중주와 건반, 기타 등 어쿠스틱한 악기로 풍부한 음악을 전한다.

‘HOPE’는 20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된 두 3월28일부터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된다.

강추

담백한 작품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애처로운 한 인물의 생애를 따라가는 경험이 마음에 들 것

비추

더 화려한 무대, 더 극적인 스토리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밋밋한 작품으로 느껴질 수도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