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첫 前대법원장 검찰 출석
사법농단 의혹에 부인하거나 책임 떠넘기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1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배우한 기자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된 양승태(71) 전 대법원장이 11일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양 전 대법원장은 대법원이 정권과 재판을 거래하고, 일선 재판에 간섭하며, 소속 판사들을 사찰했다는 사법농단 의혹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일단 이 사태가 부덕의 소치라며 몸을 한껏 낮추며 ‘도의적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받고 있는 40여개 혐의를 외면하거나 부인하며 ‘법률적 책임’은 피해갔다. 민감한 대목에선 ‘모른다’는 태도를 유지했고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은 “아랫사람이 했다”고 둘러댔다.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이날 양 전 대법관을 상대로 △재판거래 △재판개입 △법관사찰(블랙리스트)과 관련한 혐의를 집중 추궁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은 이날 조사에서 구체적 사실 관계를 묻는 검사들의 질문에 “잘 기억나지 않는다”거나 “사실과 다르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법원행정처 심의관실 등에서 한 일”이라며 혐의를 부인하는 진술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양 전 대법관은 이날 밤 8시40분 검찰 조사를 마치고 심문조서를 검토한 뒤 밤 늦게 귀가했으며, 검찰은 몇 차례 더 소환조사를 벌인 뒤 신병처리를 결정할 방침이다.

양 전 대법관은 검찰 출석에 앞선 기자회견에서도 도의적 책임만 인정한 채 법적 책임은 부인했다. 그는 자신이 42년간 일했던 법원(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 모든 것이 제 부덕의 소치니 그 책임을 모두 제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면서도 “(사법농단에) 관련된 법관들이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믿는다”고 주장했다. 그가 사태의 원인을 ‘부덕의 소치’라고 말한 것은 각종 혐의나 의혹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가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양 전 대법원장은 특히 사법농단의 온갖 의혹을 ‘자신이 지시한 일’이 아니라 ‘후배 법관들이 한 일’이라면서 혐의를 부인했다. 기자회견에서는 “나중에라도 그 사람들(관련 법관)에게 과오가 있다고 밝혀진다면 그 역시 제 책임”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관여한 부분에서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검찰 조사에서는 “(법원행정처)심의관실 등에서 한 일”이라면서 부당한 재판 또는 인사 개입 혐의를 부하 직원들에게 돌리는 등 꼬리자르기에 급급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혐의를 부인하면서 검찰 수사를 모종의 ‘프레임’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에서 "오해가 있으면 이를 풀 수 있도록 충분히 설명하겠다. 편견이나 선입견 없는 공정한 시각에서 이 사건이 소명되기를 바란다"면서 '선입견' '편견' '오해' 등의 표현을 동원한 게 대표적이다. 그는 재판거래와 재판개입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편견과 선입관 없는 시선에서 이 사건을 다뤄 달라”며 검찰 수사가 편견에서 비롯됐을 수 있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이 검찰에 불려나간 날 법원은 침묵에 휩싸였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출근길에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고 말한 뒤 구체적인 말을 아꼈다. 양 전 대법원장이 그 많은 의혹을 앞에 두고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습에 대다수 판사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양 전 대법원장께서는 검찰의 수사조차 수긍하지 않고,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 문제라는 생각조차 못하시는 분”이라며 “저런 확신범들이 법원 상층부(대법원)에 있었고, 지금도 있을 것이라는 점에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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