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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의 무덤 만든 장인 후손이 도굴꾼 ‘3000년 넘은 생업’

입력
2019.01.09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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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준호의 실크로드 천일야화] <39> 룩소르 ‘왕가의 계곡’ 

이집트 현지인들이 룩소르 나일강 서안의 한 공터에서 열기구에 화염과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이집트 현지인들이 룩소르 나일강 서안의 한 공터에서 열기구에 화염과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불꽃이 인다. 화염방사기 못지 않은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 중형 선풍기 몇 대도 동원됐다. 땅바닥에서 괴물이 부풀어오른다. 한 마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하자 수십 마리가 줄지어 솟아올랐다. 그 괴물들은 마침 뿌옇게 밝아오는 지평선도 가려버렸다. 떼지어 늘어선 열기구들이 손님맞이에 걸린 시간은 1시간 남짓 됐다.

이집트를 통틀어 가장 큰 노천박물관으로 꼽히는 룩소르의 아침은 그렇게 밝았다. 신왕조의 수도 룩소르를 하늘에서 내려다볼 생각에 새벽잠도 설쳤다. 어둠에 깔린 나일강의 크루즈배에서 도둑고양이처럼 내려 작은 모터보트로 갈아 탔다. 나일강 동쪽은 산 자, 서쪽은 죽은 자의 공간이라는 옛 이집트인들의 믿음은 도시 대부분을 나일강 동쪽에, 피라미드와 장제전은 왼쪽에 지었다. 그러다보니 크루즈도 강 우안에 정박했고, 좌안으로 넘어가려면 보트가 필요했다.

12월 새벽의 나일강은 추웠다. 아직 잠도 덜 깬 몰골로 보트에서 미니 버스로 갈아타고 한참을 달렸다. 세상은 캄캄한데 열기구를 띄우는 소리만 왁자지껄했다.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은 강강술래 하듯 원을 돌며 열기구 맞이 축제를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는 착시효과를 응용해 입에서 불을 뿜는 듯한 사진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 열기구는 더뎠다. 불꽃을 주입하다 한 번 멈칫한 후로는 잘 부풀어오르지 않았다. 다른 열기구는 모두 공처럼 빵빵해지는데 우리 열기구는 아직도 바닥에서 쭈글쭈글한 괴물의 모습이었다. 인부들이 스무 명 가까이 달려 들었다. 드디어 풍선이 부풀고 대형 바구니가 바로 섰다. 그 틈을 놓칠세라 잽싸게 바구니에 올라탔다. 몸을 돌리기 힘들 정도로 비좁았으니 정원초과는 두 말할 나위 없었다.

열기구 아래에는 나일강변의 농토와 왕가의 계곡의 경계가 녹색과 회색으로 나뉘어져 있다.
열기구 아래에는 나일강변의 농토와 왕가의 계곡의 경계가 녹색과 회색으로 나뉘어져 있다.

터키 카파도키아에서 열기구 작동법을 배웠다는 조종사가 칸막이로 나눠진 바구니 중간에 타고 양쪽에 전세계 관광객이 30여 명 올라탔다. 드디어 열기구를 당기고 있던 트럭의 밧줄이 풀리면서 순식간에 룩소르 아침 하늘로 떠올랐다.

땅은 초록색과 회색으로 명확하게 갈라져 있었다. 나일강 권역은 직사각형 형태로 구분된 밭이었고, 회색지대는 바로 왕가의 계곡이었다. 회색빛 건축물이 나올 때마다 조종사가 떠들기는 했는데, 그것이 이집트 말이다 보니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조종사가 아는 영어는 ‘굿’ 뿐이었다. 땅 위로 람세스2세의 장제전인 라메세움과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제전도 있기는 있는데 어디인지는 분간하기 힘들었다.

한참을 날던 열기구는 흙길 위에 착륙했다. 착륙지점을 알고 있던 미니버스를 타고 도로를 달리다 보니 높이 19.5m의 석조물이 길 옆에 보였다. 새벽에도 이 길을 달려왔다는데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다. 바로 멤논의 거상이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신전에 세워졌던 거상 중 좌상 2기만 남아있었다. 아침 햇살이 비칠 때마다 흐느끼는 소리를 낸다는 이 거상의 주인은 바로 트로이전쟁 때 그리스군 아킬레스에게 죽임을 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 여행객이 멤논의 거상 앞에 서 있지만 석조물에 비해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한 여행객이 멤논의 거상 앞에 서 있지만 석조물에 비해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한 이집트 어린이가 하트셉수트 여왕 장제전 경사로를 뛰어내려오고 있다. 장제전 뒤로 바위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한 이집트 어린이가 하트셉수트 여왕 장제전 경사로를 뛰어내려오고 있다. 장제전 뒤로 바위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회색빛 바위산을 병풍처럼 두른 하트셉수트 장제전은 따가운 햇볕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좌우대칭의 장제전으로 올라가는 완만한 중앙통로 앞에는 어김없이 매의 얼굴을 한 호루스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집트 꼬마들이 그 길을 뛰어올랐다.

18왕조 때 이복 동생인 투트모세 2세의 왕비였던 그는 배다른 아들 투트모세 3세를 신전으로 쫓아 보내고 22년간 이집트를 다스렸다. 스스로 파라오가 된 여성이다. 그리고는 하루 아침에 모든 기록에서 사라진 걸 보면 와신상담한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의 모든 흔적을 지운 것으로 추정된다. 하트셉수트는 딸 네페루레를 양아들 투트모세 3세와 혼인시켰으니 순수 혈통을 향한 이집트 왕실의 집념은 근친상간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집트의 역사는 도굴의 역사기도 하다. 고왕조에 지어진 피라미드가 도굴꾼의 표적으로 전락한데다 파라오조차 선조 무덤을 털었다니 남아도는 것이 없었다. 이에 따라 12왕조부터는 피라미드를 거의 짓지 않게 됐다.

여행객들이 룩소르 왕가의 계곡 진입로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바위산 꼭대기가 피라미드를 닮아 왕들의 무덤 장소로 결정됐다고 한다.
여행객들이 룩소르 왕가의 계곡 진입로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바위산 꼭대기가 피라미드를 닮아 왕들의 무덤 장소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래도 파라오에게는 사후세계의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였다. 결국 피라미드를 대체할 ‘왕가의 계곡’이 룩소르에 조성된다. 18왕조 아멘호테프 1세가 아이디어를 내고, 그 뒤를 이은 투트모세 1세(재위 BC 1493~1483)가 실행에 옮겼다. 나일강 서안의 황량한 사막 ‘데이르 엘 바하리’가 낙점된 이유는 산꼭대기가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고, 그 누구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비밀스런 장소였기 때문이다.

계곡 입구까지 코끼리열차를 타고 갔다. 지금은 길을 닦아서 주변에 뭔가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무덤을 만든 후 흙으로 덮어버리면 그냥 황량한 산과 골짜기에 불과한 곳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파라오 무덤으로 향했다.

관광객들이 왕가의 계곡 파라오의 무덤 안에서 상형문자와 그림 등을 둘러보고 있다.
관광객들이 왕가의 계곡 파라오의 무덤 안에서 상형문자와 그림 등을 둘러보고 있다.

무덤 속은 화려했다. 비스듬한 경사를 따라 길게 뻗은 무덤 속으로 들어가면 벽과 천장이 온통 파라오와 왕비, 전쟁, 승리, 동물 부조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돼 있었다. 부장품이 남았다 해도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겠지만 아예 도굴되고 없었다.

도굴꾼은 무덤을 만든 장인들의 후손이었다. 파라오의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이들 장인에 대한 대우는 후했다. 하지만 대를 이어 무덤이 늘게 되자 이를 털어 한몫 챙기려는 사람들이 장인 집안에서 생겨났다.

1875년 전문 도굴꾼 라술은 왕가의 계곡에서 조금 떨어진 비밀장소를 이집트 고대유물보존국에 공개했다. 이곳에서는 전설적인 파라오 아크나톤과 투트모세 1세, 람세트 2세 등 32명이나 되는 파라오와 왕족의 석관과 미라가 발견됐다. 1898년에도 아멘호테프 2세 등 파라오 10인의 석관과 미라 은신처가 주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서 유일하게 도굴이 되지 않은 채로 발견된 소년왕 투탕카문의 무덤 입구 팻말에 62라는 숫자가 선명하다. 이곳에서 62번째 발견된 무덤이라는 표식이다.
룩소르 왕가의 계곡에서 유일하게 도굴이 되지 않은 채로 발견된 소년왕 투탕카문의 무덤 입구 팻말에 62라는 숫자가 선명하다. 이곳에서 62번째 발견된 무덤이라는 표식이다.

왕가의 계곡이 아닌 곳에서 발견된 이유는 단 하나다. 도굴됐기 때문이었다. 라술도 고대에 미라를 만들거나 무덤을 지키던 마을 출신이었다. 룩소르 나일강 서안에 있던 쿠르나 주민은 7,000명에 이르고, 이들이 모두 도굴꾼이라는 사실도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라술의 집안은 BC 13세기부터 생업으로 3,000년 넘게 도굴에 종사한 셈이다.

그 도굴을 피한 유일한 무덤이 바로 소년왕 투탕카문이다. 3개의 무덤을 보고 내려오던 길에 우연히 투탕카문의 무덤을 만났다. 왕가의 계곡 무덤 중 62번째 발견됐기 때문에 무덤 앞에는 62라는 숫자가 쓰여있었다. 하지만 투탕카문을 만나고도 다음 일정에 떠밀려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집트를 다시 갈 핑계거리가 생겼다.

글ㆍ사진 전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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