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한국일보]하이트진로의 지난해 달력과 올해 달력. 여성 누드모델 사진을 음식 사진으로 대체했다. 하이트진로 제공

반라 여성이 술잔을 든 채 야릇한 표정으로 침대나 욕조에 누워있고, 그 아래로 달, 날, 요일 등이 적혀있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민망한 달력을 제작해온 곳은 성인용품 업체가 아닌 하이트진로, OB맥주 등의 주류업계. 지난해까지 주류 거래처에 제공하기 위해 일종의 ‘고객 서비스’ 차원으로 소량 제작하던 것인데, 일부 고객들 사이에서는 ‘수집 아이템’으로 거래될 정도였다.

그러나 일부 호프집 등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민망한 달력이 2019년부터는 사라지게 됐다. 지난해 10월 이러한 달력이 여성의 성상품화로 보는 소비자들이 늘자 2019년부터는 아예 제작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하이트진로 관계자는 “내부에서도 문제의식이 있었는데, 요청업소들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소량 만들어 왔던 것”이라며 “2019년부터는 제철음식 사진으로 만든 달력을 배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OB맥주 역시 2019년부터 여성모델 대신 풍경으로 대체했다.

주류업계가 수 십 년 동안 해왔던 달력 관행을 하루 아침에 바꾼 것은 미투 (#Me Too)부터 혜화역 시위까지, 지난 한 해 사회를 달군 ‘페미니즘’ 이슈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성차별적인 광고를 하거나, 여성 채용에 소극적이거나, 사내 성폭력사건 처리가 미흡했거나, 갖가지 이유로 ‘여혐’으로 낙인 찍힌 기업들에 구매력을 무기로 한 소비자들이 적극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사례가 적지 않았다. 기업들도 결국 사과나 제도 개선을 약속하며 소비자 운동에 무릎을 꿇었다. 외설적인 달력 제작과 관련해서도 일부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불매 운동’까지 벌이는 등 조직화 움직임을 보이자 주류업계 자세가 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페미니즘 열풍에 외설 달력 제작처럼 낡은 관행을 없애는 것만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마케팅에 활용하는 기업도 생겨나고 있다. 생리대업체 ‘나트라케어’는 ‘청량함’을 컨셉으로 내세우던 기존 생리대광고와 달리 최초로 광고에서 ‘생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여성이 겪는 고통을 말해 호응을 얻고 있다. 여성 속옷브랜드 비너스 역시 최근 광고에서 “편안함을 포기하면서 아름다워지는 건 날 위한 게 아니었다”고 말하는 등 여성을 주체적인 이미지로 그려내면서 발 빠르게 시대 흐름에 대응했다.

최윤정 여성정책연구원 평등문화교육연구센터장은 “소비 주류층인 여성이 최근 여성의 가치를 시장에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상징적”이라며 “이러한 소비시장 변화가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까지 이끌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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