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모나 립스턴은 20세기 미국 시민운동의 등뼈같은 단체인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첫 여성 지부장으로, 만 38년(1972~2011)간 사우스캘리포니아 지부를 이끌었다. 그는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에 치중하던 ACLU의 활동 관행과 원칙에 얽매이지 않고, 성 평등과 소수자 및 저소득층 생존권과 참정권 교육권 개선에 헌신했다. 그럼으로써 근년의 ACLU가 걷기 시작한 탈 정치중립의 확장된 길을 앞서 개척했다. aclusocal.org

미국의 반공주의 광풍은 1차대전과 러시아 공산화 직후인 1910년대 말 본격화했다. 우드로 윌슨 정부의 법무부(당시 장관 미첼 팔머)는 노동운동권의 급진 좌파들, 이탈리아와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혹은 그런 성향을 보이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찰과 불법 연행, 추방 등을 일삼았다. 1919년 11월부터 약 두 달 사이 시민 500여 명을 부당하게 추방했고(Palmer Raids), 남ㆍ동부 유럽 이민자 차별을 골자로 한 이민법(1924)을 제정했다. 저 일련의 과정을 2차대전 이후 매카시즘의 ‘적색 공포(Red Scare)와 구분해 1차 적색공포라 부른다.

국가권력의 그 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뉴욕의 몇몇 활동가와 헬렌 켈러 같은 명사들이 1920년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을 만들었다. 그들이 추구한 건 헌법이 보장한 시민의 권리, 특히 수정헌법 1조(종교 언론 집회 결사 등 포괄적 자유)의 권리였다. 이후 탄생한 수많은 시민권 단체들과 달리 ACLU는 직접 시위를 벌이기보다 시위자들의 목소리를 지켜주는 일, 나아가 시민권을 억압하는 악법을 저지하는 일에 주력했다. 당연히 ACLU의 주역은 법률가들이었고, 넓은 의미의 주류였다. 공권력이 헌법을 넘나들던 시절이었고, ACLU가 편든 이들이 대체로 좌파ㆍ반정부 활동가들이어서 그러기도 했겠지만, ACLU의 절대 원칙인 엄격한 정치적 중립과 무당파주의는 자기 조직과 활동가를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을 것이다. ACLU는 1925년 테네시 주 정부와 벌인 ‘스콥스 재판(Scopes Trial)’ 즉 공립학교 진화론 교육 금지법 저지서부터 9ㆍ11 테러 이후 근년의 애국법 등에 대한 수십여 건의 위헌소송까지, 미국 시민단체 가운데 연방ㆍ주 정부와 가장 자주 대법원에서 대치한 단체라는 위상과 전통을 구축해왔다. 그들은 이민과 반전, 여성 및 성소수자 인권운동 등 20세기 시민운동 어느 한 분야의 주체라 말할 순 없겠지만 그 운동들을 떠받친 주춧돌이자 미국 시민사회의 등뼈 같은 존재로, 2년 뒤면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2018년 말 현재 ACLU는 후원회원 175만 명에 상근변호사 300명, 미국 전역에 수천 명의 자원봉사 변호사를 보유하고 있다.

지금은 ACLU 회장도 여성인 브루클린 로스쿨 교수 수전 허먼(Susan N. Herman)이다. 하지만 라모나 립스턴(Ramona Ripston)이 1972년 사우스캘리포니아 지부장(사무총장) 직에 도전한 건 그 자체로 뉴스가 될 만한 일이었다. 그의 채용 면접 에피소드는 당시 사정과 립스턴의 면모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 중 하나다. 전원 남성인 지부 이사진이 ‘어린 아이를 키우는 주부가 어떻게 이 일을 하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곤 사무총장이 되면 무슨 일을 우선적으로 추진할 것인지 물었다. 립스턴은 “이사진을 전면 개편해 그런 성차별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ACLU쯤 되는 조직이다 보니 이사진도 꽉 막힌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는 비 법률가 출신 여성 최초 ACLU 지부장으로 그 해 9월 1일 임기를 시작했고, 자신의 약속을 가차없이 이행했다. 그는 ACLU 지부 최초로 동성애자 인권 전담 변호사를 고용했고, 노숙자ㆍ저소득 이민자 자녀 교육문제 등 헌법적 자유의 이슈뿐 아니라 경제적 차별ㆍ불평등 문제 등 ACLU 활동 영역을 거침없이 개척했고, 그 과정에 더러 본부의 입장과 맞서기도 했다. 2011년 2월 퇴임할 때까지 사우스캘리포니아(SoCal) 지부를 ACLU의 가장 전투적이고 전위적인 지부 중 하나로 만들고, 캘리포니아를 진보와 자유의 서부 거점이 되게 하는 데 일조한 라모나 립스턴이 11월 3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립스턴은 60년대부터 ACLU 뉴욕지부의 도드라진 활동가였다. 그는 전 남편인 헨리 디 수베로(Henry di Suvero)를 도와 뉴저지 지부장이 되게 했고, 72년 스스로 사우스캘리포니아 지부장이 됐다. 67년의 립스턴(왼쪽)과 수베로. ACLU-SoCal 페이스북

립스턴은 ACLU의 전통적 리더들과 여러모로 달랐다. 그는 뉴욕 브루클린 칼리지 물리학교수 아버지와 회계사 어머니의 딸로 1927년 2월 18일 태어났다. 48년 헌터 칼리지 정치학과를 졸업했지만 마땅한 직장을 얻지 못해 시작한 게 란제리 모델 일이었다. ‘바르비종 모델ㆍ연기학교’의 컨설턴트로도 일하며 미국 전역을 돌아 다녔고, 란제리, 특히 슬립 전문 바이어로 한 백화점에 고용돼 일하기도 했다. 그의 지부 후임인 헥터 빌라그라(Hector Villagra)는 립스턴의 멋진 몸매와 빼어난 외모, 치렁치렁한 금발을 두고 “언뜻 보면 카트린느 드뇌브로 착각할 정도였다”(nyt, 2018.11.18)고 말했다. 옷차림도 당시 ACLU활동가나 거리의 투사들과는 사뭇 달랐다. 친구인 인권변호사 캐럴 소벨(Carol Sobel)은 “그런 남다른(투사 이미지와 다른) 용모는 일로 상대하는 남성들로 하여금 립스턴을 좀 ‘쉽게’ 생각하게 만들곤 했다”(LAtimes, 11.3)고 말했다. 물론 그러다 ‘큰 코 다친’ 이들이 많았다.

1992년 LA폭동(로드니 킹 사건) 당시 LA경찰서장 대릴 게이츠(Daryl F. Gates, 1926~2010)는 90년 9월 미 상원 법사위 청문회에서 “마약 중독자들은 치워 없애야 할 존재(taken out and shot)”라고 발언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는 경찰 특수기동대(SWAT) 출신의 강성이었다. 91년 3월의 경찰관 로드니 킹 집단 폭행 사건이 이듬해 거대한 폭동으로 비화한 것은 관련 경찰관들의 무죄 석방이 직접적 계기였지만, 그 전에 한 시민이 촬영한 폭행 장면 비디오 테이프가 언론에 공개돼 시민들이 진상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기자회견을 열어 그 녹화영상을 최초로 공개한 이가 립스턴이었고, 게이츠의 사퇴 촉구운동을 주도한 것도 그의 ACLU였다. 립스턴은 경찰 진상조사위원회 회의장에 들어가 게이츠 사임 촉구 서명서 뭉치를 게이츠의 면전에 집어 던졌다. 결코 ‘ACLU스럽다’고 말하기 힘든 그의 그 ‘퍼포먼스’는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시민의 분노를 대변했고, 게이츠는 그 해 6월 사임했다. ‘게릴라 포스터 아티스트’라 불리는 캐리커처 작가 로버트 코널(Robert ’Robbie’ Conal, 1944~)이 게이츠를 풍자한 포스터를 제작, 91년 4월의 어느 한밤중에 LA시내 곳곳에 내붙인 일이 있었다. 게이츠의 얼굴을 사격 표적지 바탕에 깔고 그가 한 말을 패러디(~taken out and beaten)한 문구를 적은 포스터였다. 경찰은 그림들을 수거하는 한편 그를 명예훼손 및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립스턴의 ACLU는 ‘전공분야’인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LA경찰을 고발했다. 91년 12월 인터뷰에서 립스턴은 “게이츠의 저 말은 법의 집행자로서 갖춰야 할 법과 법 절차에 대한 기본적 인식조차 의심케 한다. 마약 공급자와 달리 중독자는 처벌해야 할 범죄자가 아니라 국가가 풀어야 할 숙제다”라고 말했다. 코널의 포스터를 두고 그는 “게이츠에게 로드니 킹 사건의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평소 무분별한 인종주의적 발언을 일삼았고, 경찰관들의 차별적 행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사태가 야기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퇴임 이후 게이츠는 립스턴을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에 빗대 ‘라모나 더 리퍼’라 불렀다. 립스턴은 캘리포니아 주정부와 LA 시당국, 특히 경찰과 대체로 불화했다.

그(SoCal-ACLU)는 84년 LA경찰의 시민운동 진영에 대한 광범위한 불법 사찰을 고발, 조직내 정보국을 해산하게 했고, 81년 ‘멕시칸아메리칸 법률ㆍ교육재단’과 함께 LA카운티의 선거구가 백인 대표성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부당하게 획정(Gerry-mandering)된 것을 시정, ‘멕시칸의 어머니’라 불리는 여성 정치인 글로리아 몰리나(Gloria Molina)가 카운티 1구의 시의원(1991~2014)이 되는 길을 닦았다. 낙태에 관한 한 캘리포니아가 의료적 판단에 앞서 산모의 선택을 가장 존중하는 주 중의 하나라는 평을 듣게 하고, 미국 주들 중 가장 낙후한 수준의 캘리포니아 빈민지역 공립학교 문제점을 중점 부각해 2004년 10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하게 하는 데도 그의 ACLU가 기여했다.

2006년 4월 미연방 제9항소법원은 홈리스의 노숙을 범죄시해 노숙자들을 연행ㆍ구금하는 것은 인권 침해라고 판결(Jones v. City of LA)했다. 법원은 “수정헌법 8조(과도한 벌금ㆍ형벌 금지 조항)는 집이나 쉼터가 없는 시민이 불가피하게 공공장소에 눕거나 앉아 머무는 것을 처벌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밝혔다. 립스턴의 SoCal 지부와 캐럴 소벨의 공익변호사단체 ‘National Lawyer’s Guild’가 함께 건 소송이었다. SoCal ACLU 법률책임자 마크 로젠바움은 “노숙자의 20%는 참전군인이고, 약 1/4은 아이들이다. 이제 시는 노숙의 문제를 범죄가 아닌 공동체가 함께 풀어야 할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길 바란다”고 밝혔다.(aclu.org) 립스턴은 “밥도 잠자리도 없는 이들에게는 우리가 말하는 형평(equity)과 정의란 한낱 환상일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건 그의 직원뿐 아니라 뉴욕 본부의 ‘꼰대(old guard)’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1991년 대통령 조지 H. 부시는 서굿 마셜 연방대법관 후임으로 컬럼비아특별구 항소법원 출신의 보수(근년에는 중도라 평가 받는) 성향 흑인 판사 클래런스 토머스(Clarence Thomas)를 지명했다. ACLU본부는 중립을 선언했다. 찬반 입장을 정하는 표결에서 인준 거부를 선택한 게 기준(60%)에 1% 미달하는 59%였기 때문이었다. 립스턴은 본부 결정에 반발, SoCal 지부 자체 표결을 통해 압도적 표차(인준거부 38, 기권 2, 찬성 0)로 토머스의 인준을 거부한다는 지부 입장을 공개 천명했다. 립스턴은 “소수자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이나 학교 기도 의무화, 낙태문제 등에 대한 토머스의 기존 입장을 볼 때, 그가 대법원에서 시민 자유를 보호하고 권리를 신장하는 데 기여하리라 판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SoCal 지부는 본부의 ‘60% 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전통적으로 ACLU는 보수ㆍ진보 진영 양측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곤 했다. 너무 급진적이라는 비판과 너무 온건하다는 비판. 게다가 ACLU의 ‘미국식 자유’에 대한 완고한 집착 때문에 ‘우군’들의 비난을 사는 예도 드물지 않다. 총기 소지 자유에 대해 한결같이 미국총기협회를 편드는 것도 그렇지만, 아동포르노 제작ㆍ공급업자는 처벌하되 영상물을 소지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원칙에도 동의하지 않는 후원자가 많다. 1977년 신나치그룹인 미국국가사회주의당(NSPA) 회원들이 일리노이주 쿠크카운티의 유대인 마을 스토우키(Stokie)에서 열려던 집회ㆍ행진을 주 법원이 불허하자 대법원에 항소해 그들의 수정헌법 1조 권리를 지켜준 것도 ACLU였다. 립스턴이 저 일련의 사안들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그의 지부가 본부와 자주 불화한 건 사실이었다. 예산문제를 두고도 그의 지부는, 특정 캠페인 예산이 한 기부자(단체)에게서 충당되는 비율 한도를 제한하는 원칙을, 본부 입장에 맞서 고수했다. 그러면서도 립스턴 취임 당시 도시 변두리 가발가게 2층 사무실에 직원 6명이 전부였던 SoCal 지부는 그가 퇴임할 무렵 직원 50명에 캘리포니아의 ‘강남 8학군’이라 할 만한 보수 성향의 오렌지 카운티에도 제2지부(2005)를 둘 만큼 성장했다. 배우 버트 랭커스터와 제임스 휘트모어, 가수겸 배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영화감독 롭 라이너, 프로듀서 노먼 리어 등이 그의 친구이자 SoCal 지부의 막강한 후원자였다.

립스턴은 속옷회사 경영자와 인권 변호사, 지방법원 판사 등과 4차례 결혼-이혼했고, 64세이던 91년 4년 연하의 제9연방항소법원의 진보성향 판사 스티븐 라인하트(Stephen Reinhardt)와 결혼해 해로했다.(aclusocal.org) 처음부터 결혼 전 성을 썼던 그는 “그렇게 결혼을 많이 할 줄 몰랐지만,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고 농담하곤 했다. 라인하트와 결혼할 당시 주변에서 이해관계인 재판부 기피 원칙 때문에 좋은 판사를 잃게 됐다며 “보수 법관을 골라 ‘제거’할 생각을 왜 못 했냐”고 농담한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Latimes, 2010.2.23)

립스턴에게 1996년의 '캘리포니아 주민투표법안 209', 즉 공공기관 취업 소수자 우대정책의 폐지는 뼈아픈 패배였다. 그는 여성과 소수인종이 경찰관이 될 기회가 줄어들 것이라 우려했다. 경찰 일반과 불화한 그였지만 시위 현장에서 여성 경찰관을 만나면 저렇게 웃으며 담소했던 모양이다. aclu.org

그와 SoCal 지부는 1994년의 ‘주민투표법안(Proposition) 187’ 즉 불법 이민(체류)자 의료복지 및 자녀 진학 규제 법안을 저지하지 못했다. ‘SOS, Save Our State’ 법안이라 불리는 저 법은 주민투표로 가결(58.9% 찬성)됐지만, 위헌소송 끝에 99년 민주당 신임 주지사 게리 데이비스가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다행히 발효되지는 않았다. 공공기관 취업과 입시의 소수자 우대정책을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1996년의 ‘법안 209’도 주민 55%의 찬성으로 가결됐고, SoCal은 위헌 소송 항소심에서도 패배했다. 2013년 주 상원의 수정안(No.5)으로 대학입시에 한해 법 시행이 유예됐지만, SoCal의 패배였고 소수자 권리의 퇴보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LA는 가장 다양한 구성원들의 도시 중 한 곳이다.(…) 인종관계에 관한 한 캘리포니아의 미래에 미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가 여기서 잘못하면 어디서도 잘 해낼 수 없을 것”(Latimes, 1998.2.1)이라고 말했다.

80년대 이후 기조적으로 위축되던 시민운동 동력은 2001년 9ㆍ11사태로 결정타를 입었고 2016년의 대선은, ACLU진영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파국적 결과였다. 동시에 변신과 새 출발의 기점이기도 했다. 9ㆍ11의 그 해 전국 사무총장이 된 앤서니 로메로(Anthony Romero)는 ACLU 100년의 DNA에 각인된 정치 중립과 무당파주의의 원칙을 깨고, 전임 리더들의 우려와 반발을 무릅쓰며, 주ㆍ연방 단위 각종 선거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로메로는 2018년 6월 뉴요커 인터뷰에서 “이제 ACLU가 법정에서 벗어나 거리에서, 정치적 현안과 캠페인을 통해 시민들과 만나야 할 때”라고, “시민들에게 정책ㆍ운동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넓게 보자면 립스턴이 70년대부터 견지해온 ACLU의 비전이었다. 로메로는 “립스턴과 그의 SoCal 지부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뒤따랐던 수많은 개혁과 중요한 의제들을 이끈 법률적 엔진이자 선도자(pacesetter)였다”고 애도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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