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기행] <6>장시성 휘주문화 우위엔 ④샤오치와 리컹
리컹(李坑)마을 도랑에 비친 기름종이 우산 ‘유지산’

밤 새워 험난한 길을 가는데 날이 밝아오면 얼마나 기쁠까? 이를 천강포효(天剛破曉)라 한다. 당나라 말기 황소(黄巢) 민란이 전국을 휩쓸던 시기, 왕만오 일가는 휘주부에서 장장 400리를 피난 내려왔다. 시냇물이 흐르고 산으로 둘러싸였으며 풀과 꽃이 만발한 들판이자 비옥한 땅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짐을 풀었다. 9세기부터 정착했으니 그 어떤 천년고진 부럽지 않은 세월을 지녔다. ‘동이 트는 땅’ 샤오치(曉起)는 양생하(養生河)가 흘러 샤오촨(曉川)이라고도 불렀다.

‘동이 트는 땅’ 샤오치 입구.
황국을 파는 백복루
황제가 ‘황국’이라는 이름을 하사한 국화차.
백봉루 옥상에서 바라본 민가 지붕.

마을 초입에 샤오치의 특산인 황국(皇菊) 가게가 보인다. 객잔이자 찻집인 백복루(百福楼)다. 샛노란 국화차가 눈길을 끌고, 발길을 잡는다. 게다가 국화차에 황제가 등장하니 예사롭지 않다. 청나라 말기 광서제 때 소금 운반을 책임지는 염운사(鹽運使)였던 샤오치 출신 관리가 은퇴 후 고향으로 내려온다. 황제는 치적이 훌륭한 관리에게 황금 1,000냥을 하사했다. 관리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대신에 황제 화원에서 약용으로 재배하는 국화를 달라고 했다.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처럼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하고 싶다는 간청이었다. 동쪽 울타리 아래 피어난 국화와 더불어 유유자적으로 여생을 마치겠다니 황제도 어쩔 수 없었다. 샤오치의 토양과 궁합이 맞아 국화차는 맛도 좋지만, 색깔도 금황색을 띤다. 광서제에게 조공하니 나라에 좋은 징조라며 황국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황국은 정말 은은, 상큼, 달콤, 신선하다. 한 통 200g에 우리 돈으로 1만원도 하지 않는다. 몇 통 사고 나서 주인 아주머니에게 마을 전체를 보고 싶다고 했다. 자기네 지붕으로 올라가라고 한다. 차를 사지 않아도 열어 주었을 인품이다. 4층으로 올라간 후 다시 계단을 타고 지붕으로 올랐다. 정말 마을이 한꺼번에 보인다. 하천을 따라 저택이 반듯하게 이어진다. 지붕과 담장은 세월의 흔적을 묻었다.

◇생전 처음 보는 백인당 앞의 글자

좁다란 골목을 따라가면 다닥다닥 저택이 붙었고 마을 사람들은 여유롭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에 건축된 저택으로 600년도 더 지난 백인당(百忍堂)에 이른다. 안을 볼 수 없었지만 바깥에 쓴 표지만 봐도 자부심이 엿보인다. ‘중국에서 최고(最古)’ 그리고 ‘최봉(最封)’까지는 읽었다. 그 다음 왼쪽 위로 시선이 가다가 그만 멈춘다. 도대체 처음 보는 글자여서다. 간체, 번체 다 기억해 보지만 글 쓴 사람을 찾지 않으면 알 도리가 없다. 수식하는 관계인 적(的)과 집인 주방(住房)은 쉽다. 점(占)과 민책받침 부수(廴)가 합쳤으니, 책받침 부수가 붙은 첩(迠)은 아니다. 그냥 포기하고 지났다.

기사를 쓰며 겨우 찾았다. 생각해보면 간단했다. 바로 봉건의 건(建)이다. 중국에선 1956년 한자의 간자(簡字) 방안이 통과된 후 우여곡절 끝에 1977년 공포가 됐다. 이후 추가 및 보완하려던 2차 한자 간략화 계획이 있었는데 1986년 정치적 혼란기에 자연스레 폐지됐다. 이때 폐기된 글자인 셈이다. 2차에 포함된 글자들을 중국 속기에서 쓰긴 하나 보다. 백인당은 그야말로 가장 ‘봉건적’인 집으로 밝혀진 셈이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글자를 시골 사람은 이렇게 기억에 새기고 있다.

백인당 앞 글자, 지금은 쓰지 않는 ‘건’이 가장 왼쪽 위에 있다.
백인당 문 위에 태극 문양과 일선.

백인당 문 위에 동그란 팔괘도는 ‘일선(一善)’까지 사각형으로 감싸고 있다. ‘하루에 한 가지 선행’을 하자는 뜻이다. 중용(中庸)에 ‘득일선(得一善)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잃어버리지 말라’고 했으니 참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이다. 팔괘도는 우주 만물의 형성 과정, 주기의 순환과 음양의 상호작용을 설명한다. 역경(易經)에 따라 가운데의 태극이 주위의 팔괘를 생성하는 형상이다. 팔괘도를 보니 갑자기 화나는 일화가 떠오른다. 2005년 베이징에서 중국어 공부할 때다. 겨우 알아듣기만 하고 말은 제대로 못 할 때 어떤 모임에서 만난 대학원생이 “한국은 중국의 속국 맞지? 태극기에 태극이 있으니까”라고 했다. 지금이라면 제대로 혼내겠지만 그땐 그냥 답답했다.

◇문화혁명 회의 장소는 목공예 판매 가게
문화혁명 당시 회의장이 목공예 파는 가게로 변신했다.
목공예로 만든 포대화상과 마오쩌둥.

샤오치는 장목(樟木)이 많아서 목공예 제품이 많다. 문혁회장(文革會场)이던 장소는 다른 가게보다 훨씬 넓다. 온통 벽마다 문화혁명 시대 분위기가 그대로 남았다. 마오쩌둥 주석 어록과 초상화가 붙어 있다. ‘단결, 긴장, 엄숙, 활발과 정치, 작풍, 전략전술’도 낯설다. 그 당시 동지는 어려운 시절에도 ‘성적과 광명, 용기가 필요했다’고 적혀 있다. 시골에 가면 여전히 50년도 더 지난 흔적이 많이 남았다. 당시에는 절규이거나 고통이었겠지만 지금 보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을 멋진 추억이 된다. 포대화상의 환한 미소는 이 세상에 없는 인간 마오쩌둥을 더욱더 초라하게 하는지도 모른다.

두 우물이 함께 있는 쌍정인월 중 식수로 쓰는 우물.
단오에 거는 쑥은 벽사의 뜻을 담는다.

바로 옆에 우물이 있다. 두 개가 나란히 붙은 쌍정인월(雙井印月)이다. 큰 우물은 식수로 사용하며 작은 우물은 물통을 씻는 용도다. 큰 우물은 유난히 맑은데 식수를 증명하듯 금붕어 두 마리가 자유로이 헤엄치고 있다. 우물 부근 집 대문에 무언가 걸려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줄기까지 함께 걸린 쑥이다. 휘주마을에는 모든 집마다 대문에 쑥을 거는 풍습이 있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인 음력 5월 5일 단오에 전염병 창궐을 막고자 걸어 놓은 벽사(僻邪)다.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전쟁보다 돌림병이 더 위태로웠으니 마을 사람 모두 한마음이었다. 약용으로 효험이 높은 쑥에 대한 기대였다. 그 기대는 지금도 변하지 않고 매년 반복된다. 귀신이 가져가지 않으면 생화가 마르듯 쑥은 오랫동안 꼿꼿하다.

◇배 타고 들어가는 이씨 집성촌 리컹
이씨 집성촌 리컹 안으로 배를 타고 들어간다.

휘주문화 우위엔 연재 첫 편에 소개한 이학명촌(理學名村), 여씨 집성촌인 리컹(理坑)과 발음이 같은 마을이 있다. 이씨 집성촌 리컹(李坑)을 우위엔 발품 기행의 마지막 마을로 소개한다. 산에서부터 구불구불 마을을 돌고 내려오는 도랑과 작은 돌다리, 민가가 어우러진 풍광이 이어진다. 걸어도 10분, 배를 타도 10분이지만 우아하게 맑은 물 위를 사뿐히 미끄러진다. 뱃사공은 묵묵히 앞만 보고 노를 젓지만, 처음 배를 탔으니 사방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다. 자그마한 언덕 앞에서 멈춘다. 타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내려서 보니 생각보다 배가 길다.

배가 지나는 리컹의 도랑에는 다리가 많다.
리컹의 대부제. 문조와 전조가 화려하다.

마을 안에도 도랑이 흐르고 다니는 배가 또 있다. 서서히 걸어가니 도랑 양쪽이 다 집이다. 10m 남짓한 다리가 여러 개 있어 왕래가 자유로워 보인다. 청나라 함풍제 시절 종오품 벼슬을 지낸 이문진의 저택인 대부제(大夫第)가 도랑 변에 자리 잡고 있다. 날아갈 듯한 처마 모양을 한 덮개인 문조(門罩)와 화려한 전조(磚雕)가 다른 저택에 비해 부끄럽지 않다. 거실 이름은 주인의 풍모와 닮는 법인데 춘애당(春藹堂)을 보니 봄처럼 온화했으리라 생각된다.

도랑 따라 형성된 휘어진 길과 민가.

두 갈래 길의 경계인 통제교.

다리 위에 서서 보니 흐르는 도랑을 따라 집을 지어서 길도 부드럽게 휘어진 모습이다. 길을 따라서 가면 중심지인 신명정(申明亭)이 있다. 마을 회의를 하던 장소로 정자 밑으로 길이 있다. 마을은 두 갈래 길로 갈라선다. 통제교(通濟桥)를 넘어 오른쪽으로 점점 작아지는 도랑을 따라간다. 대나무 통발 안 붕어는 조금 답답해 보인다. 비가 많은 강남에 자주 등장하는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인 유지산(油紙傘) 반영이 도랑을 수놓고 있다.

마을 끝에 거상의 저택인 동록방(銅綠坊)이 있다. 휘주 상인은 차나 소금 등으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은데 동록방 주인 이빙여는 좀 특이했다. 동판에 밥을 오래 보관하면 얇은 녹이 생기는데, 이 녹이 농작물의 벌레를 죽인다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다. 이 얇은 녹을 녹수(綠銹)라 하는데 영어로는 파티나(patina)다. 곧바로 사업에 뛰어든 이빙여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었으니 17세기 청나라 강희제 시대 일이다. 300년도 넘었는데 리컹에서 유일하게 1세조부터 지금까지 후손이 사는 저택이다. 선대의 부와 유지를 지키는 유선당(裕善堂)이 깔끔한 이유가 있었다.

◇무과 장원급제한 이지성 고거
휘주지방 최초의 무장원 이지성 고거.

마을 뒷산을 돌아서 내려가면 리컹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지성(李知誠) 고거가 나온다. 이지성은 남송시대 1166년에 무장원(武狀元) 급제했다. 과거가 시행된 1,000년 동안 휘주 지방에선 단 4명의 장원을 배출했고 이지성이 최초였다. 문관과 무관은 따로 과거를 보는데 전국 1위가 장원이다. 지방 과거를 거쳐 중앙에서 합격한 진사 중에 3명이 황제 앞에서 전시(殿試)를 보게 된다. 이때 3등을 탐화(探花), 2등을 방안(榜眼), 1등을 장원이라 부른다. 이 3명에게 급제(及第)라는 말을 쓰고 그 아래는 출신(出身)이라 표현한다. 장원급제는 오로지 한 명이니 그 영광이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리컹의 중심이자 회의장소인 신명정.
리컹 도랑에서 먹은 쑥떡.

다시 신명정을 지나 도랑을 따라 되돌아나가는 길이다. 좌판에 풋풋한 녹색 쑥떡을 판다. 만두처럼 빚은 모양도 있고 떡살로 찍은 꽃문양도 있다. 쑥 향은 싱그럽고 식감은 쫄깃하다. 저택마다 홍등도 많이 걸려 있어 밤이면 참 예쁜 야경이 펼쳐질 듯하다. 다시 오면 반드시 가장 마음에 드는 객잔을 잡고 도랑에 비친 홍등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 곳이다. 인문의 향기를 담은 밀주를 찾아내 한시를 읊조리며 말이다.

아쉬운 발길은 리컹만이 아니다. 휘주문화를 품은 강서 우위엔 마을이 다 그렇다. 오초분원을 넘어 3박 4일 동안 찾아다닌 마을이 다시 새록새록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얀 담장, 검은 기와가 무수히 펼쳐지고 저택마다 예술작품이 수두룩했다. ‘거기가 거기고, 다 똑같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내가 본 마을마다 풍광, 인문 모두 개성이 뚜렷했다. 너무 풍성해 미처 기억에 남기지 못한 이야기도 참 많다. 발품의 땀이 마르기 전에 다시 찾아가리라.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라이프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