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스즈키컵 우승 영웅… “인자ㆍ겸손 호찌민 닮아” 젊은층 열광
베트남 대사 “한국 외교관도, 정치인도, 기업도 못한 일을 해냈다”
15일 오후 하노이 미딘 경기장에서 열리는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결승전 관람을 위해 베트남 국민들이 경기장으로 모이고 있다. 베트남 국기 금성홍기와 태극기를 든 베트남 응원객들이 경기장으로 가는 길에 베트남 국부 호찌민 전 주석 초상화와 나란히 놓인 박항서 감독 초상화를 지나치고 있다. 흰색 정복 차림의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사진도 보인다. 지압 장군은 1954년 프랑스와 벌인 항불(抗佛) 디엔비엔푸 전투와 항미(抗美)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하노이=정민승 특파원

박항서(59) 감독이 이끌고 있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이 15일 10년 만에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에서 우승하면서 박 감독은 베트남의‘국민 영웅’ 자리에 한층 더 다가서게 됐다. 그러나 이번 승리로 박 감독 한 명의 개인적 영예만 높아진 것만은 아니다. 한국과 베트남 현대사의 아픈 상처가 스포츠를 통해 극복될 수 있음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 감독은 지난 수십년간 한국의 어떤 정치인, 기업인, 외교관도 해내지 못했던 한국과 베트남의 진정한 화해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을만하다. 결승전이 열린 하노이 미딘 경기장을 찾은 한국 관광객과 교민들은 베트남 관중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고, 한국인들은 한국대표팀이 출전하지 않은 경기임에도 TV로 생중계를 지켜보며 베트남 대표팀의 일거수일투족에 환호했다.

15일 호찌민시에서 직접 경기를 보기 위해 하노이 출장을 앞당겨 왔다는 응우옌 반 티엡(36)씨는 “자랑스럽다. 행복하다. 앞으로의 일에 더 자신감이 생겼다. 박 감독 덕분”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양국 관계자들도 박 감독이 두 나라 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입을 모았다.

하노이 베트남 국립대 광고홍보학과의 응우옌 티 탄 후엔 교수는 “한국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인식은 박 감독 이전과 이후로 명확하게 갈린다”면서“박 감독은 한류 뿐만 아니라, 스포츠를 통해서도 한국의 국가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김도현 주 베트남 대사는 “박 감독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베트남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래서 베트남이 감동할 수 있었다”며 “그 어느 외교관도 정치인도 기업도 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양국 관계 끌어올려놨다”고 평가했다.

특히 베트남전 전후 세대인 30대 이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박 감독을 국부(國父) 호찌민 전 주석과 비교하는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다. 박 감독이 전후 세대인 젊은이들이 상상만 해왔던 ‘소프트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응우옌 꾸엔 뉴(19ㆍ호찌민 경제대학 경영학과)씨는 “특유의 부드러운 리더십 때문에 나를 포함한 주변 친구들이 박 감독을 좋아하고 있다”며 “학생(선수)들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교과서에서 막연하게 배웠던 호찌민 주석이 생전에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결승전이 열린 미딘 경기장 인근에서는 박 감독의 얼굴 그림이 호찌민 전 주석의 초상화와 나란히 진열돼 판매되기도 했다. 베트남 사회학 전공자인 이계선 하노이 탄롱대 교수는 “역사 속 인물을 존경하지만 젊은 학생들의 경우 같은 공간, 시대를 같이하고 있는 ‘살아 숨쉬는 영웅’에 열광하는 현상을 보인다”며 “특히 국민을 가족처럼 대하고 인자하면서도 겸손하며 평생을 검소하게 살다 간 인물로 배운 절대 우상 호찌민 전 주석의 많은 면들이 박 감독의 이미지와 겹치는 것은 의미 있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박 감독이 경기 후 기자회견 때마다 공(功)은 선수들에게 돌리고 과(過)에 대해서는 “전술을 잘 못 쓴 결과”라며 자신이 떠안는 모습은 베트남 현지 언론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박 감독 전속 통역으로 박 감독의 리더십을 분석한 책을 낸 레 휘 콰(45)씨는 “선수는 물론 선수의 부모들까지 챙기는 박 감독을 선수들은 신뢰하고, 그를 통해 선수들 내면의 힘을 끌어내는 힘을 박 감독은 갖고 있다”면서 이번 성과를 이전 외국인 감독들은 보여주지 못한 특유의 리더십에서 찾았다. 작년 10월 취임한 박 감독은 13번째 외국인 축구 감독이다. 외국인 축구 감독 중에서는 박 감독에 앞서 지난 2008년 처음으로 AFF 우승컵을 베트남에 안긴 포르투갈 출신의 엔리끄 칼리스토 감독이 있다. 그도 국민 영웅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박 감독처럼 깊은 감동까지는 전달하지 못했다.

외신들도 이번 승리의 배경 분석에 분주한 가운데 미국 폭스스포츠는 ‘AFF 스즈키컵 2018: 박항서의 선수들은 어떻게 우승컵을 들어 올렸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박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master class)’가 이번 경기에서 인상 깊은 승리를 이끈 가장 큰 요인”이라고 보도했다. 마스터 클래스는 특정 분야의 대가, 거장이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수업을 말한다.

하노이=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