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일터에서 갑의 횡포에 수없이 사표를 썼다 지웠다 하는 을들. 게티이미지뱅크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사회의 빛과 소금이 돼야 한다. 어린 시절 흔히 들었던 말일 터다. 나는 일찍이 이런 고정관념을 깼다. 우연히 본 TV프로그램 덕분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선행을 해 온 시민을 찾아가 칭찬도 하고, 가전제품 같은 선물도 선사하는 예능 프로였다.

제목조차 기억 나지 않는데, 이것 하나는 또렷하다. 주인공의 집에 걸려 있던 가훈이다. ‘어디서나 꼭 필요한 사람은 되지 못할지언정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은 돼야 하지 않겠냐.’ 보는 순간, 마음 속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연달아 켜졌다. 가치의 전복이었다. 곱씹어 볼수록 현실적인 명언이다. 우리 주위에는 의외로 ‘있으나 마나 한 사람’조차 별로 없어서다. 오히려 있어서 해가 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새벽 출근길 라디오 방송만 들어도 그렇다. 이 프로에는 ‘사표 한 장’이란 코너가 있다. 가수 송대관의 ‘차표 한 장’을 개사해 DJ가 노래를 걸쭉하게 부르며 시작한다. 청취자가 사표를 던지고 싶은 대상과 사연을 적어 보내는 ‘가상 사직서’다. 예능이라고 생각했는데, 들어보니 다큐다.

“2년 전부터 과장님 부탁으로 카풀을 하는데 저를 운전기사 취급해요. 조수석이 아닌 뒷자리에 앉질 않나, 퇴근 후 친구를 만나야 하니 기다리라고 하지를 않나. 얼마 전엔 중간에 만두를 가득 사 들고 타더니 냄새만 풍기고 그냥 내리더라고요.”

이건 어떤가. 병원 방사선사의 사직서다. 엑스레이(X-ray)나, 자기공명영상(MRI) 같은 방사선 장비를 다루는 방사선사인데, 원장은 그에게 온갖 잡일까지 떠맡긴다. “병실 TV를 고치라더니, 구급차 운전에 약탕기 청소까지 시켜요.”

사장이 식구, 친구, 친척들까지 시도 때도 없이 데려와 메뉴에도 없는 음식을 만들라고 지시해 괴로운 골프장의 요리사, 자기 코 풀 화장지를 사 오라고 시키더니 ‘왜 내가 쓰는 브랜드를 사 오지 않았느냐’고 짜증 내는 만성비염 상사 때문에 자괴감 느끼는 회사원,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한없이 좋은데 단 둘이 있을 때만 욕쟁이가 되는 선배 때문에 힘든 직장인….

새벽 FM라디오에서 ‘갑질 미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프로그램 이름은 ‘펀펀 투데이’인데, 뻔뻔한 갑에 지쳐 ‘퍽퍽 투데이’를 보내는 을의 울분이 넘친다. 회사에서 매일 자기 친구 점심 밥상까지 차리게 하는 사장, 자기가 빵을 좋아한다고 내 손에도 들리고 먹지 않으면 일을 더 시키는 상사, 마주쳤다 하면 “요즘 살 쪘다”, “눈가에 주름이 많네. 주사라도 맞아” 외모 지적 ‘작렬’인 팀장의 사연 같은 건 애교로 들린다.

이 코너에 소개되면 모바일 햄버거 상품권이 선물로 간다. 그 많은 이들이 햄버거 먹자고 사연을 보낸 건 아닐 터다. 어디에 말도 못하고 끙끙 앓다, 라디오 방송을 ‘대나무 숲’ 삼았을 거다. 자신의 얘기가 새벽 5시 30분, 전파를 타고 흘러나오는 것에서라도 위로를 받고 싶었는지 모른다.

올 한 해 언론에도 온갖 갑질 행각 보도가 잇따랐다. 검찰 간부, 유력 정치인, 원로 문인의 ‘성폭력 갑질’, 기업 총수, 초등생 언론재벌 3세의 ‘폭언 갑질’, 웹하드업체 대표의 ‘엽기 갑질’까지. 갑이 ‘슈퍼 갑’이라야 뉴스가 될 뿐, 오늘도 수많은 을들은 일상에서 억울함을 삼키고 있다.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씨는 공감의 힘을 다룬 책 ‘당신이 옳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 관계에서는 갑과 을로 나눌지 모르지만 심리적으로 모든 사람은 갑 대 갑이다. 사람 사이의 경계를 인지할 수 있어야 나도 지키고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개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을들에게 이런 조언도 한다. “상사가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는 질문으로 바꿔야 한다. 내 삶이기 때문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가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라도 되는지부터 생각해 볼 일이다.

김지은 디지털콘텐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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