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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유럽 사용설명서

입력
2018.12.13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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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문제에 대한 유럽의 역할을 논할 때 두 가지 인식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유럽이 한반도 문제의 아웃사이더라는 과소평가와, 유럽이 미국을 우회할 수 있는 주체라는 과대평가가 그것이다. 대(對) 유럽 외교에 대한 평가에 있어 이러한 편차는 유럽, 특히 유럽연합(EU)의 본질적 성격에 대한 불완전한 해석에 기인한다.

유럽국가들은 EU 공동체의 틀 안에서 규범과 가치, 그리고 다자주의에 기반한 외교 원칙을 견지해 왔다. 또 인간 안보, 위기 관리 등 연성 안보와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강조해 왔다. 실제 미국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압박 전략으로 나간 2000년대 중반, 다수 유럽국가는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개설하고 정치적 대화 및 인도적 지원을 지속한 바 있다.

그렇다면 현 제재 국면에서 미국과 유럽은 다른 주체일까? 여기서 과거와의 착시 현상에 주의해야 한다. 북한 핵 실험이 본격화하고 유엔 제재가 강화한 이후, 특히 지난 수년간 EU의 대북 정책은 비확산과 인권 문제에서 과거보다 훨씬 강경한 입장을 취해 왔다. 현 상황에서 남북관계의 진전과 대화를 통한 평화 구축에는 변함없는 지지를 보이고 있고, 제한적 차원의 인도적 지원 증가는 기대해 볼 수 있지만 제재 완화는 다른 문제다. 다자주의적 차원의 제재는 물리적 충돌 방지를 위해 EU가 사용할 수 있는 주요한 외교 수단이다. 규범 준수를 원칙으로 한 제재는 단순히 전략적으로 풀었다 조였다 하기 어렵다. 규범에 대한 강조는 거래 성사에 전력을 기울이는 미국, 남북한보다 오히려 더 강할 수밖에 없다. 피상적 목표로 감정적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고, 미국과 다를 거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없다. 더구나 제재 국면에서 EU가 미국과의 공조 없이 독자적 전환점을 마련할 역량이나 의지가 뚜렷하지 않고, 우회 전략이 통할 여지도 많지 않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유럽의 관심도는 어떨까? 현지에서 종종 “산소가 부족해”라는 말을 듣는다. 유럽이 왜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고, 또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확신이 없다는 의미다. 브렉시트와 난민, 극우파 부상 등 내부 문제도 산적해 있다. 한국이 대북 경협, 동북아 연계 사업에서 유럽에 경제적 인센티브를 보장해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국내 기업의 투자 안정성도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법적, 제도적 장치 없이 미래 사업계획으로 유럽을 유인하기란 쉽지 않다. 실질적 비핵화의 진전이 오히려 산소 공급을 빨리 해줄 수 있다.

규범 주체와 다자 주체로서 EU 역할을 인식하고 공감해야 유럽을 움직일 수 있다. 돌파구가 필요한 한국의 입장이 성급했을 수도, 원칙을 강조하는 유럽의 대응이 아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급할수록 정공법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공감대의 형성이 더 빠르고 단단한 공조의 틀을 만들 수 있다. 특히 EU의 외교 전략과의 접점을 만들어야 한다. 인간 안보와 지속 가능성 등 핵심 의제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고, 인권 문제에서도 뚜렷한 원칙을 보여야한다. ‘위기관리협정’을 통해 해적 퇴치나 글로벌 위기 관리를 포함한 EU의 공동안보방위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종종 간과됐지만, EU가 실제 한국에 많은 감사와 존중을 표한 것은 이러한 외교적 접점이 작동할 때였다. 명분 축적을 통해 실리를 챙겨야 한다.

한반도 평화 정착에 있어 유럽의 역할은 중요하다. 이를 최대한 활용하려면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갈 길이 바쁜데 고리타분한 원론적 얘기라고 덮어버릴 게 아니라, 외교전략의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종종 그 기본이 뭔지 잊어버리고 단기적 목표를 맞춰 왔고, 그게 비단 유럽만의 경우도 아니었다. 실효성을 갖는 외교전략은 제대로 된 사용설명서에 기반을 두기 마련이다.

이재승 고려대 장 모네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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