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사이트 등에서 볼 수 있는 '인신보호제도' '성년후견제도' 배너 광고. 온라인 캡처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차동석(25)씨는 지난달 29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 첫 화면에서 ‘인신보호제도’ 배너(막대 광고)를 발견하고 반가움과 황당함이 교차했다. 인신보호제도는 위법한 행정 처분이나 개인에 의해 부당하게 수용시설에 갇혀 있는 사람이 시설의 장 또는 운영자를 상대로 법원에 구제를 청구하는 제도. 꼭 필요하지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제도를 널리 알리고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함께 그려진 그림이 마음에 걸렸다.

광고 속 남성은 붉은색 슈퍼맨 망토를 두르고 금색 방패를 든,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이었다. 반면 여성은 양 손을 모은 채 남성 뒤에 숨어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차씨는 “법원에 구제를 청구할 수 있다는 실제 제도 내용과 상관없는, 단지 ‘보호’라는 단어만을 묘사해 오히려 제도 내용을 곡해하는 엉뚱한 그림”이라며 “남성은 보호자, 여성은 피보호자라는 이미지를 사용해 차별적 성 역할을 고착화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법원의 일부 인터넷 배너 광고가 차별적 성 역할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인신보호제도뿐 아니라 △국민참여재판 △성년후견제도 △법원조정센터 등 일반시민에게 필요한 사법제도를 적극 알리려는 취지는 좋지만, 표현방식이 아쉽다는 것. 예컨대 이미 영화 드라마 등 수많은 문화 콘텐츠 속에서 고착화해 누구나 쉽게 떠올리고 받아들이는 ‘약한’ 여성을 보호하는 ‘강한’ 남성 고정관념을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다. 성 역할 구분에서 탈피하려는 최근 사회 분위기를 거스르고 있는 셈이다.

질병 장애 노령 등 사유로 정신적 제약을 가진 성인들이 인격체로서 후견제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성년후견제도’ 광고에서도 남성을 강자로, 여성을 약자로 묘사하고 있다. 후견인을 필요로 하는 노인은 여성인 반면, 그 뒤에 선 젊은 후견인은 남성이다. 직장인 박현종(37)씨는 “단순화한 그림이라 성별을 드러내지 않는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 굳이 할머니로 그렸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여성을 피보호자로 묘사하지는 않지만, 남성만을 법조인 등 주요 인물로 등장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일반시민이 직접 배심원으로 형사재판에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 배너 그림에서 변호인은 젊은 남성이다. 조정담당판사 혹은 법원 조정위원회가 분쟁 당사자들로부터 주장을 듣고 조정안을 제시해 합의에 이르게 하는 ‘조정제도’ 배너에서도 악수를 나누는 두 주체는 양복을 입은 남성으로만 그려져 있다.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라는 반발도 있다. 대학원생 오모(34)씨는 “성별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보는 이들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라며 “남성 뒤에 숨은 여성 그림은 차별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주요 인물이 남성인 게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다. ‘아직은 여성을 피보호자로 놓아야 그림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회적 맥락이 있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상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일부 배너 그림은 제도 내용 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린 것으로 보인다”라며 “보호하는 남성과 보호 받는 여성이라는 전형적인 성 고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법원 관계자는 “해당 배너는 광고제작 전문업체에 외주로 제작한 것”이라며 “내용을 쉽게 인지하게 하기 위해 만든 이미지로 성 역할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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