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부미푸트라의 나라, 말레이

“부미푸트라 때문에 나태해졌다” 국가경쟁력 저하 요인으로 꼽혀
정부의 인종 차별 철폐 움직임에 야당ㆍ이슬람단체 8일 시위 예고
지난 5월 총선에서 패하면서 61년만에 야당이 된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의 아흐마드 자히드 하미디 대표. 마하티르 정부의 말레이계 우대정책 완화 움직임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결집, 대규모 반정부 집회를 가질 계획이다. 말레이시안 인사이트 캡처

다민족으로 구성된 말레이시아 내에서 인종차별 논란을 빚어온 말레이계 우대정책인 ‘부미푸트라(Bumiputera)’ 완화 문제를 놓고 말레이시아 내부에서 종족ㆍ인종간 대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말레이시아 야당 통일말레이국민조직(UMNO)과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이 현지 이슬람 단체들과 오는 8일 수도 쿠알라룸푸르 시내 므르데카 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예고하자 정부는 발단이 된 유엔 ‘인종차별철폐협약(ICERD)’ 비준 계획을 철회하는 등 물러섰다. 하지만 UMNO 등은 집회 강행 의지를 다지고 있다. 아흐마드 자히드 하미디 UMNO 대표는 “우리가 (반정부) 집회에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8일 행사는 정부가 ICERD를 비준하지 않겠다고 내린 결정을 축하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현지매체 말레이시안 인사이트에 말했다.

◇부미푸트라의 나라

‘땅의 아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부미푸트라(Bumiputera)’는 말레이시아 원주민을 일컫는 말로, 말레이계와 중국계의 빈부 격차를 줄일 목적으로 1970년대 시행된 정책. 1960년대 말레이계는 말레이시아 인구 55%를 차지하면서도 경제력은 인구 20%에 불과한 중국계 주민에 장악된 상태였다. 그래서 내부 불만이 컸고, 급기야 1969년 5월13일 폭동을 일으켰다. 쿠알라룸푸르 캄풍 바루 지역에서 일어난 이 폭동으로 8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말레이계의 민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도입된 부미푸트라는 이후 말레이계의 경제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중국계 등 이민족간의 경제 격차는 상당히 해소됐고, 나자(Naza)와 같은 말레이계 재벌도 출현시켰다. 기아자동차의 카니발 모델을 들여다 조립 ‘나자리아’라는 이름으로 판매, 큰 수익을 올린 기업이다.

실제로 말레이계가 받는 혜택은 광범하다. 각 대학은 말레이계에 입학 정원의 70~80%가량을 먼저 할당해야 한다. 일부 대학은 말레이계 학생만으로 100% 정원을 채우는 곳도 있다. 취업 시험에서 가점을 주는 것은 물론, 주택을 구매할 경우 일반 분양가보다 7% 저렴하게 살 수 있다. 은행의 각종 대출 금리도 저렴하다. 또 정부 조달 사업에서도 말레이계는 우선 발주권과 납품권 등의 혜택을 누리며, 기업들은 의무적으로 일정 비율 이상을 말레이계로 채워야 한다. 한국기업의 현지 한 주재원은 “최고 수준의 고교 성적으로 의대에 진학하려던 중국계 지인의 자녀는 결국 호주로 유학갔다”며 “부미푸트라는 비 말레이계에 좌절감 그 자체”라고 전했다.

지난 7월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시내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말레이계 시민들이 ‘말레이 우대’ 정책 완화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트레이츠타임스 캡처
◇국가경쟁력 저하 요인

하지만 말레이계 우대정책이 40년 이상 지속되면서 비말레이계 역차별 논란과 함께 국가 경쟁력 저하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한국의 세 배가 넘는 영토, 원유와 팜오일 등 풍부한 천연자원, 그러면서도 3,200만명에 불과한 인구의 말레이시아는 2012년 처음으로 1인당 소득(GDP) 1만달러를 돌파했지만, 2018년에 9,940달러를 후퇴하는 등 중진국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모두 부미푸트라에 따른 경쟁력 약화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분석이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대표적인 나라로 거론된다. ‘중진국 함정’은 개발 초기 단계에서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다 1인당 GDP 4,000~1만달러 수준에서 성장이 장기 정체하는 현상이다. 익명을 요구한 말레이계 소식통은 “부미푸트라 때문에 말레이계들이 나태해지고, 말레이시아가 오늘의 모습에 머물고 있다는 공감대가 있다”며 “말레이계 내부에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전했다. 마하티르 총리도 한국인들을 만날 때마다 과거 경제 수준이 말레이시아보다 떨어졌던 나라가 크게 성장한 것을 거론하며 부러움을 표시한 바 있다. 지난달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회동한 문재인 대통령 앞에서 “말레이인은 게으르다”고 이야기 했을 정도다.

베트남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주재원은 “‘부미푸트라=게으름뱅이’라는 공식이 성립할 정도”라며 “인구 과반을 차지하는 국민이 이 정책에 기대어 생활하는 상황에서 경제성장은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뜨거운 감자’에 정권운명

집회 규모는 열려봐야 알겠지만, 오는 8일 대규모로 예고된 시위가 아주 새로운 일은 아니다. 지난 7월에도 쿠알라룸푸르 캄풍 바루 지역에서 말레이계의 권익 보호를 주장하며 집회를 연 바 있고, 1967년 영국에서 독립한 뒤 지난 5월 총선까지 줄곧 말레이시아를 통치하던 국민전선((Barisan Nasional) 집권기에도 비슷한 시위는 있었다.

UMNO는 BN의 주축이다. UNMO는 이번 시위에 수십만 명이 참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레이시아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수십 년 동안 뜨거운 감자였지만, 2,000여명이 참가한 지난 7월 시위는 49년 전 800명 사상자를 낸 폭동이 일어난 곳과 같은 곳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그 의미가 남달랐다”며 “새 정부에 대한 구 정권의 정치공세 수단으로 부미푸트라가 이용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말레이계에 대한 혜택을 줄이려는 정부를 상대로 한 야당측의 대여 공격 수단에 이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61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룬 마하티르 정부의 고민도 이 지점으로 모아진다. 전 정부의 경제정책 실정과 부정부패 심판을 내세워 정권을 잡았지만, 부미푸트라 정책을 손보지 않은 채 경제를 성장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 당시 마하티르 캠프에서 뛴 한 관계자는 “국민 다수인 말레이계 표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에 부미푸트라 정책 완화가 쉽지 않다”면서 “성장을 가로막는 이 차별정책을 그대로 두고서 이 정부가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호찌민=정민승 특파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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