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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모닥불 앞에서 맞이할 새해

입력
2018.12.02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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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자취를 감춘 겨울 광장에서 죽은 나무를 빈 드럼통에 넣어 태우는 모닥불만큼 세상을 향해 공평한 온기를 전해주는 게 또 있을까. 건조해진 공기 덕분에 바싹 마른 나무들이 큰 어려움 없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붙기 시작하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모여들고, 이들은 값을 치를 필요 없이 다가온 순서대로 손을 내밀 수 있으니 말이다. 냉기를 밀어내고 한 자리씩 차지하는 낯선 이들에게 무슨 이해타산이 존재할까. 그저 불이 필요한 이들에게 모닥불은 짧지만 강렬한 행복이다.

인류가 언어를 사용하기 한참 전인 30만 년 전부터 들판에 선 이들에게 모닥불은 생존과 안락을 의미했다. 온기가 닿는 곳까지 운명을 함께하는 이들의 영역 경계선이 그려졌고, 우리는 지금까지 이 공간의 이름을 공동체라 부르고 있다.

문학 작품에서 모닥불은 종종 편견을 해소하고 아픔을 서로 달래주는 공동체의 오브제로 그려진다. ‘재당도 초시도 문장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중략/ 붓장시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1936년 간행된 백석의 시집 ‘사슴’에 수록된 시 ‘모닥불’의 구절들에는 세속적인 지위와 직업, 세대의 구분 없이 모닥불 앞으로 모여드는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정밀한 묘사가 담겨있다. 누군가 곁불을 쬐고 있을망정 어쨌든 온기의 영역 안에서 공동체 구성원을 겨냥한 배척과 편견의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더부살이 아이’와 ‘땜쟁이’가 ‘늙은이’, ‘초시’와 부대끼지 않고 화합하는 그림의 한 가운데 모닥불이 놓여있을 뿐이다.

1989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시인 안도현의 시집 ‘모닥불’에 실린 시 ‘모닥불’에도 누구에게나 어느 곳에서나 차등없이 따스함을 전해주는 모닥불의 심상이 드러난다. ‘어두운 청과 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 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중략/ 모닥불은 피어 오른다.’ 시구에 등장하는 모닥불은 장소와 곁에 모이는 이들을 구별하지 않고 타오른다. 얼어붙은 장바닥과 공사장에서 상인이나 인부가 아니라고 몸 녹일 곁을 주지 않으랴.

작든 크든 사회 공동체 속에서 성별, 세대, 직업, 종교 등 구성원을 편 가르는 요란스러운 표찰을 몸에 붙인 우리는 모닥불 앞에 선 그들처럼 어울리고 장벽을 허물었을까. 아쉽게도 그러지 못했다. 한국 사회가 흘려 보낸 2018년은 몰이해와 배척, 그리고 혐오로 물들었다. 자신과 다른 사상을 신봉하고 종교를 따르며, 상반된 환경과 신념으로 살아가는 타인과 집단을 향한 무분별한 적대감. 2018년 첫날부터 해빙분위기를 타기 시작한 남북관계를 제외하면 우리가 목격한 한 해의 대부분 사건은 이러한 무관용과 관련이 깊다. 이수역 폭행 사건, 홍대 누드모델 몰카 사건 등을 놓고 남녀가 상대 성을 몰아붙이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대결들, 공공장소에서 끝없이 목격된 젊은이와 노인들의 극단적인 혐오의 충돌, 가장 존중해야 마땅할 모성마저 ‘맘충’이라 부르며 차별적 혐오의 대상으로 삼아버린 군중, 외국인 노동자에 가해지는 눈먼 폭력과 다문화 가정에 쏘아대는 비주류를 향한 거친 시선. 새해에는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배척해온 마음을 내려놓고 대다수의 우리가 모닥불 앞에 선 채 함께 추위를 견뎌내는 이웃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최근 활동을 시작한 한 여성 커뮤니티는 단지 여성들만을 위한 폐쇄적인 페미니즘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다른 성, 동의하지 않는 생각에 배타적인 워마드 등이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운동은 건강한 공동체의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믿음이다. 모닥불이 지닌 관용과 배려의 이미지를 표방한 이 여성단체의 이름은 ‘모닥불’이다. 혐오로 얼어붙었던 공동체의 응달에서 또 다른 ‘모닥불’들이 따뜻하게 타오르는 2019년을 기대한다.

양홍주 기획취재부장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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