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한국일보] 프레디 머큐리. 배계규 화백

1946년 아프리카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에서 태어나 1991년 영국 런던에서 숨졌다. 태어났을 때 이름은 파록 불사라. 하지만 숨질 때까지 20년 넘게 사용한 이름은 프레디 머큐리다. 지역을 넘고, 인종을 뛰어넘는 삶을 살았던 머큐리가 이제 시간을 가로질러 한국인들의 사랑을 다시 받고 있다. 27년 전 추억과 함께 시간 속에 묻혔던 머큐리는 할리우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으로 지금 이곳에 소환됐다.

‘보헤미안 랩소디’는 10월31일 개봉해 지난달 29일까지 관객 524만2,661명(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모았다. 음악을 소재로 한 영화로는 국내 최고 흥행 수치다. 미국 밖 흥행 수익에서도 한국(2,463만837달러)은 영국(5,065만1,460달러)에 이어 2위다. 귀에 익숙한 퀸의 노래를 곁들인 영상과 남달랐던 머큐리의 삶이 관객의 마음을 흔들었다.

머큐리의 가족은 페르시아계 인도인이었다. 대대로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다. 머큐리 집안은 어딜 가나 소수였다. 머큐리는 성정체성에서도 소수자였다. 머큐리 자신이 천생 떠돌고 방황할 수 밖에 없는 보헤미안이었다.

머큐리는 제약 많은 삶을 파격으로 돌파했다. 그는 남자들로만 구성된 록그룹의 이름을 퀸으로 명명했다. 대중에게 익숙한 음악을 하라는 거대 레코드사 중역의 압박을 뿌리치고 오페라 요소를 가미한 ‘보헤미안 랩소디’의 발표를 강행했다. 꽉 조이는 바지에 민소매 티, 짧은 머리, 짙은 콧수염으로 패션의 새 기류를 형성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퀸의 히트곡 중 하나인 ‘쇼 머스트 고 온’(쇼는 계속돼야 한다)이 흐른다. 머큐리의 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시간이 흘러도 그는 국내 4050세대에게 ‘최고의 친구’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피플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