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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천주교 풍파 세 차례나 넘긴 다산 “진짜 재앙은 이 일로부터 시작”

입력
2018.11.29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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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진산 사건의 종결 

강준흠의 '삼명집'에 실린 '홍문관교리이공묘지명'. ‘홍문관 교리 이공’은 이기경으로, 이 묘지명은 이기경의 유배로 끝난 진산 사건 이야기를 자세히 전한다. 연세대박물관 유일본.
강준흠의 '삼명집'에 실린 '홍문관교리이공묘지명'. ‘홍문관 교리 이공’은 이기경으로, 이 묘지명은 이기경의 유배로 끝난 진산 사건 이야기를 자세히 전한다. 연세대박물관 유일본.

 ◇함경도 유배형에 처해진 이기경 

‘눌암기략’에 이기경이 초토신 상소를 올리게 된 경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기경은 본래 성격이 급했다. 하지만 그가 상중에 글을 올린 것은 급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형세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악원에서 올린 조사 보고서에 아주 많은 얘기가 있었는데도 채제공이 이를 모두 삭제해버리고, 다만 이승훈과 서양 책을 본 한가지 일만 장황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는 사실 이승훈의 처지를 위해주려 한 것이지, 이기경과 홍인호를 해치려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인들이 했다는 말로 겁을 주어, 이승훈과 함께 서양 책을 본 것도 사학의 무리이니, 서인이 함께 싸잡아서 죄를 치려고 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이기경이 몹시 괴로워하며, 여러 차례 채제공에게 편지를 써서 다급함을 알렸고, 채제공은 경연에 올라가 아뢰겠노라고 해놓고 오래되어도 아무 조처를 취하지 않으므로 이기경이 마침내 글을 올리는 행동이 있었던 것이다.” 이재기는 이 기사 끝에 “또한 채제공은 그 책임을 감히 벗어나지 못한다”고 썼다.

이기경의 상소가 올라가자 정조는 격노했다. 상중의 상주가 스스로 초토죄인을 일컬으며, 그것도 하필 궁중에 재계(齋戒)가 들어 몸가짐을 삼가야 하는 기일에 상소를 올렸다. 또 그 내용 중에 임금 앞에 차마 담아서는 안될 불경스런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이승훈을 욕하는데 골몰한 나머지 조정까지 싸잡아 모욕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정조는 이기경의 상소가 단지 조정의 수치에 그치지 않고 세도(世道)의 변괴에 해당한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가 지금 상중에 있는데도 이토록 제멋대로 구니, 우선은 가벼운 죄로 처리해 함경도 경원부에 사면 없는 유배를 보내라고 처결했다.

 ◇뼈저린 자각과 꼬이는 관계 

임금의 예상을 넘어선 반응에 이기경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홍낙안과 그 배후에 있던 홍인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천주학의 원흉을 처단하라고 상소했더니, 도리어 상소한 사람을 무고죄로 몰아 유배형에 처하고 정작 자신들이 지목한 사학죄인에게는 면죄부를 주었다. 이기경은 초토신 상소에서 새롭게 다산을 물고 들어갔지만, 놀랍게도 임금은 이에 대해 일언반구의 반응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임금의 진노는 다산을 물고 들어간 데서 증폭된 것일지도 몰랐다.

이튿날인 11월 14일, 우부승지 홍인호가 이기경의 입장을 두둔하면서 자신은 슬쩍 발을 빼려는 듯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홍낙안도 장문의 상소문을 따로 준비했다. 하지만 홍낙안은 임금의 서슬에 놀라 상소문을 기록으로만 남기고 올리지는 못했다. 이들은 이 일로 현재 자기들의 힘으로는 천주학을 믿는 무리들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벽위편’은 이때 일을 이렇게 적었다. “이때 사학의 부류가 홍낙안과 이기경을 헐뜯어, 쇠를 녹이고 뼈를 녹여 수레 가득 귀신을 실을 기세였다. 비록 공정한 마음과 안목을 지닌 사람이라도 또한 모두 입을 다물고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밝히지 못했다. 홍인호도 처음에는 비록 홍낙안의 장서에 간여하지 않았지만, 홍인호가 올린 상소 중에 저들이 내세운 것이 오로지 벽사위정(闢邪衛正)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한 말이 있게 되자 사학의 무리들이 크게 못마땅하게 여겨 원망과 분노를 품음이 홍낙안만 못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홍인호와 그의 사촌처남 다산의 관계는 갈수록 꼬여만 갔다.

 ◇승복 못할 결과 

홍낙안 등과 함께 공서파의 핵심 멤버였던 강준흠(姜浚欽)은 이기경을 위해 쓴 ‘홍문관교리이공묘지명(弘文館校理李公墓誌銘)’에서 이기경이 조정에서 자신에게 이승훈과 같은 죄를 씌우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 상소문을 올려 자신의 누명을 해명하고, 채제공의 온당치 못한 일처리를 언급했다고 적었다. 이 글을 본 정조가 대신을 흔들려는 의도가 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되면서 그를 유배형에 처했다.

채제공은 이기경이 유배간 뒤에도 임금 앞에서 그를 흉국화가(凶國禍家), 즉 나라와 집안에 재앙을 끼치는 인간으로 지목했다. 홍낙안도 이 일로 벼슬길에서 밀려났다. 반대로 이승훈은 다시 벼슬을 회복했고, 이가환과 정약용은 오히려 승진하기까지 했다.

공서파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같은 결과는 도저히 승복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이후로 공서파들은 입을 다물고 제 한 몸 보신하기에 바빴고, 젊은이 중 벼슬길에 마음이 급한 자들은 점차 신서파 쪽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이 또한 강준흠이 이기경의 묘지명에서 한 말이다. 홍낙안은 정미년 반회 사건 당시의 공론화 실패에 이어, 이번에도 야심차게 팔을 걷어 부쳤지만, 아무 소득도 거두지 못한 채 역풍만 맞고 말았다.

 ◇재앙이 여기서 비롯될 것이다 

풀려난 이승훈은 이기경이 함경도 유배형에 처해졌다는 말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하하하! 그 자식 참 고소하다. 제깟 놈이 우리를 함부로 건드렸으니 당해도 싸지!” 다산이 말했다. “자형! 그러지 마십시오. 장차 우리 당(黨)의 재앙이 이 일로부터 비롯될 것입니다.” “당치 않은 소리! 자넨 겁이 너무 많아.”

이기경은 상복을 입고 눈물을 뿌리며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유배지로 떠났다. 다산은 이기경에게 미안한 한편으로 께름칙했다. 다산 자신도 일이 이렇게 마무리 지어질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 이기경이 그래도 이승훈과 다산을 두 번씩이나 위해주려 했는데, 이승훈 형제가 이를 역이용해 이기경을 올가미에 걸었다.

이후 다산은 이따금 가장을 잃은 이기경의 집을 찾아가 그의 어린 아들을 보살펴주었다. 이기경 모친의 소상(小祥) 때는 엽전 열 꿰미나 되는 거금을 부조하기까지 했다. 4년 뒤인 1794년 봄 대사면 때도 이기경은 석방자 명단에 들지 못했다. 그러자 다산이 승지 이익운(李益運)을 찾아갔다. “이기경이 비록 마음이 불량하지만 소송에서 져서 꺾였으니, 한 때는 통쾌해도 훗날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들어가 고하여 그를 풀어주심만 못합니다.” 그 결과 이기양은 4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다시 벼슬길에 오르게 된 그를 모두 따돌렸어도 다산만은 이기경을 옛 친구로 대접해 평소처럼 인사를 나누곤 했다. ‘사암연보’에 나온다. 하지만 두 사람의 악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면돌파형과 권모술수형 

다산은 직선적이어서 문제 앞에서 늘 정면돌파를 택했다. 구차하게 돌아가거나 결탁하지 않았다. 다산은 협잡을 미워했고 요령을 부리지 않았다. 이기경이 자신의 이름을 끌고 들어갔지만, 그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해주었다. 천주학에 관한 한 자신도 떳떳치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이승훈 형제는 술수에 능했다. 이재기는 ‘눌암기략’에서 이치훈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이치훈은 이승훈의 아우다. 어려서부터 눈치가 자못 빠르고 남의 눈썹 사이의 기미를 잘 살폈다. 한 세상을 교만하게 휘젓고 다니면서 일을 만나도 어려워하는 빛이 도무지 없었다. 그를 보는 자가 곁눈질 하여 보지 않음이 없었다.”

이치훈은 이재기에게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임금과는 밀계(密契)가 있어 매일 밤 옷을 갖춰 입고 궁중에 들어간다네. 이 때문에 내 형이 죽지 않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내 외숙이 좋은 벼슬을 얻었지. 이 때문에 내가 또한 급제했다네.” 이재기는 이 말을 인용하고 나서, “거룩한 조정이 맑고도 밝은데 어찌 이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 설령 있다손 쳐도 어찌 입으로 발설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적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한해 전인 1790년 12월, 정조는 초계문신들에게 대궐에서 숙직하면서 7일만에 ‘논어’의 강(講)을 마치게 했다. 다산은 당시 상의원(尙衣院)에서 숙직을 섰다. 다음 날 강을 바치기 위해 열심히 ‘논어’를 읽고 있는데, 각리(閣吏)가 찾아왔다. 소매 속에서 슬그머니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주며 말했다. “나으리만 알고 계십시오. 이것이 내일 강을 바칠 부분입니다.” 다산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것이 어찌 강을 바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란 말이냐?” 아전이 씩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전하의 분부이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 마땅히 전편을 읽으리라.” 하고는 아전이 건네는 종이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아전이 고개를 젓고 웃으며 물러갔다.

화성능행도 서장대 야조도 부분. 진산 사건 와중에 화성건설을 추진 중이던 정조에게 공학 실무 역량을 갖춘 다산은 꼭 필요한 인재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화성능행도 서장대 야조도 부분. 진산 사건 와중에 화성건설을 추진 중이던 정조에게 공학 실무 역량을 갖춘 다산은 꼭 필요한 인재였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다음날 아침 경연(經筵)에 나가 ‘논어’를 강하게 되었을 때, 정조가 각신들에게 갑자기 말했다. “정약용만은 특별히 다른 장을 외우게 하라.” 다산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다. 임금이 웃으며 말했다. “과연 전편을 다 읽었구나.” 정조는 이런 놀이를 즐겼다. 다산을 골탕 먹이려고 슬쩍 떠본 것인데, 다산은 정도를 지켜 걸려들지 않았다.

한강에 주교(舟橋)를 설치할 당시에도 다산은 전례도 없던 배다리 설치에 대한 보고서를 올려 아무 문제없이 실행에 옮겼다. 유속이 빠른 한강에 가로 두 줄로 배를 늘어 세워 다리를 만드는 일은 공학적 설계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자칫 임금이 거둥할 때 예상치 못한 사고라도 나면 뒷감당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산은 아무 문제없이 배다리의 설계를 마무리 지었다.

다산은 임금의 의중을 한발 앞서 읽었고 원하는 바를 알아 꼭 맞게, 아니 그 이상으로 처리했다. 정조의 입장에서 이런 신하를 어찌 총애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더욱이 정조는 본격적으로 화성 건설의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그러자면 채제공의 진두지휘와 다산의 실무 보좌가 더욱 절실했다. 두 사람 없이 이 일은 추진할 수가 없었다.

진산 사건의 핵심인 윤지충은 다산의 이종사촌이었다. 이후 홍낙안과 이기경의 상소와 고변으로 1787년의 정미반회사까지 낱낱이 까발려졌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다산의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다산은 천주교와 관련된 1785년 명례방 추조적발 사건, 1787년 정미반회 사건, 1791년 진산 사건 등 세 차례의 풍파를 간신히 넘겼다. 하지만 다산이 천주교 문제와 관련해 넘어야 할 산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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