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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법관 독립’도 이해 못하는 게 우리 사법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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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법관 독립’도 이해 못하는 게 우리 사법 수준”

입력
2018.11.20 18:27
수정
2018.11.20 18:29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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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성 법조인들은 예상 이상의 불행, 개인의 안위만 추구한 이들은 영광 누려”

20일 서울 서교동 카페창비에서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자신이 낸 책 '법률가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창비 제공
20일 서울 서교동 카페창비에서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자신이 낸 책 '법률가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창비 제공

“사법부 독립이요? 헌법이 보장하는 건 사법부가 아니라 법관의 독립이죠. 사법농단 사건은 우리가 아직 거기까지 진도를 못 나갔다는 걸 잘 보여주는 사건이고요. 법관회의에서 탄핵까지 거론됐다는 건 대단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법관은 법관으로서 서로 대등하고 독립적 위치에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으면 합니다.”

20일 ‘법률가들’(창비)을 내놓은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서울 서교동 카페창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책은 일제 말에서 한국전쟁까지, 한국 법조계의 기반이 조성되는 과정을 인물 중심으로 추적한 700쪽 분량의 기록이다. 3,000여명의 법조인 자료를 모으고 확인하는데 3년 반의 시간을 들였다.

타이밍이 묘하다. 세상은 사법농단 사건으로 시끄럽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법률가들’은 우리 사법이 왜 이런지, 역사적으로 파고든 책이 되어버렸다. 김 교수에겐 사법농단 사건이란 “윗사람이 상고법원 같은 어느 한가지 문제에 딱 꽂혔을 때, 스스로 최고 엘리트라 자부하는 법률가들이 공적인 의무를 저버리면서 대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국적 법률가의 초상이다. 법률가가 국가의 기술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은 동시에 한국 엘리트의 역사라 할 수도 있다.

원래 책의 출발은 김홍섭(1915~1965) 판사 이야기였다. 개인적으로 법률가의 길을 택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법조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인 김홍섭 판사 얘기를 쓰려다 보니 그와 동시대 인물들이 눈에 들어왔고, 동시대 인물들을 더듬어가다 보니 ‘20세기 한국땅에서 존경받을 만한 법률가가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부딪히게 됐다. 식민지, 해방, 전쟁을 겪으면서 온갖 ‘빨갱이 조작 사건’, ‘대량학살 사건’들이 있었는데, 그 때 법률가들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는 의문이다. 이런 의문을 가지고 해방 전후 시기를 들여다본다는 건 사실 폐허를 응시하겠다는 결의다. 김 교수는 그 폐허를 “자신을 반성한 이들은 예상 이상의 불행을 맛봤고, 개인의 안위만 추구한 이들은 기대 이상의 영광을 누렸다”는 문장으로 정리했다.

이는 우리 법조계의 뿌리가 생각만큼 단단하지 않더라는 사실에 연결되어 있다. 일단 “일본 사람들이 만들어놓고 간 사법제도 자체가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것을 북돋기보다 법률 기술을 익힌 사람이냐 아니냐를 중시하는 시스템”이었다. 여기엔 조선인 법률가를 잘 키우지 않고, 똑똑한 조선인은 서기 정도로나 활용하려 했던 일본의 의도도 작용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방은 갑자기 찾아왔다. 일본인들이 떠나자 일본인과 함께 했던 법률가, 혹은 일본인 밑에서 일했던 서기들로 그 자리를 채웠다. 김 교수는 이승만ㆍ박정희 정권 때 검찰총장과 법무장관, 대법관, 대법원장 등을 역임한 민복기(1913~2007)를 전자의 대표 사례로, 오제도(1917~2001)ㆍ이홍규(1905~2002)를 후자의 대표 사례로 꼽았다.

민복기는 일제시대임에도 친일파 집안이었기에 일제시대 때도 잘 지냈고 해방 뒤에도 모든 것을 다 누렸다. 오제도ㆍ이홍규는 서기로 일하다 해방 뒤 혼란 속에서 운 좋게 법률가로 인정받은 이들이다. 그 행운을 “하늘에서 별을 땄다”고 표현했다. 김 교수는 이들에 대해 “제대로 된 시험을 치른 게 아니니 판사보다는 수사실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검사를 지망했고, 그래서 이 두 명이 공안검사, 특수검사의 시초가 됐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사건’을 만들어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제도는 ‘사상검사’로 이름을 날렸고, 이홍규 아들은 대법관 출신 정치인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다.

법조인들은 쉬쉬하고, 역사학자들은 간과하는 엘리트 법률가들의 과거를 추적한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창비 제공
법조인들은 쉬쉬하고, 역사학자들은 간과하는 엘리트 법률가들의 과거를 추적한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창비 제공

‘이법회’의 존재도 흥미롭다. 1945년 8월 조선 땅에선 14일부터 17일까지 조선변호사시험이 치러지고 있었다. 15일 정오, 일본의 항복선언이 나오자 일본인 시험 감독관들이 다 철수해버렸다. 응시자들은 ‘이법회’를 만들어 도망가더라도 합격증을 내놓으라 해서 실제 받아냈다. 김 교수는 “1922년부터 1944년까지 법률가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일본인을 포함해 164명이었는데, 1945년 이법회를 통해 합격증을 받은 남한 사람만 106명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엄청난 인력풀이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법조계 내에서 아는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깃거리로만 떠돌던 이법회의 실체다.

이와 대조되는 게 ‘법조 프락치 사건’이다. 오제도 등 사상검사들이 기획한 이 사건의 피해자로는 김영재(1907~?), 강중인(1908~?) 같은 인물이 있었다. 김영재는 경북 안동의 명문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었고 강중인은 기독교 입장에서 일본을 반대했던 인물이다. 이 둘은 어쨌던 일제시대 검사를 지낸 경력 때문에 해방 뒤 일정 정도 자숙의 시간을 가진 뒤 법조인으로 복귀한다. 화근은 중도좌익 성향의 ‘조선법학자동맹’을 만든 것이다. 프락치로 몰렸다. 김 교수는 “법조 프락치 사건은 법원에서 대부분 무죄가 나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졌고, 이들은 남한에서 살 수 없다고 보고 월북을 택했다”면서 “그 때문에 이들에 대해 지금도 ‘월북한 거 보니 빨갱이 맞네’라는 평이 통한다”고 말했다.

시대의 광풍에 휩쓸려간 사람들 이야기, 폐허를 직접 마주해본 심정은 어떠했을까. 김 교수는 “그래도 그 사람들은 제 위치에서 열심히 살았다”면서 “이 책이 ‘그러니까 제 것만 열심히 챙겨라’라는 의미로 읽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라며 웃었다. 누구보다 법률가를 꿈꾸는 이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김진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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