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서양 정치학은 우리와 괴리” 한국적 국제정치학 씨를 뿌리다

입력
2018.11.19 04:40
수정
2018.11.19 11:35
2면
0 0

<38> 이용희의 ‘일반국제정치학(상)’

국제정치학자이자 미술사가이기도 했던 르네상스형 지식인 동주 이용희. 서구 중심의 국제정치학을 넘어선, 보편적 국제정치학을 고민했다. 연암서가 제공
국제정치학자이자 미술사가이기도 했던 르네상스형 지식인 동주 이용희. 서구 중심의 국제정치학을 넘어선, 보편적 국제정치학을 고민했다. 연암서가 제공

오늘날 지식인이 자기 전공을 넘어 다른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내기란 쉽지 않다. 그 까닭은 현대사회에서 학문이 더욱 분화되고 그 과정에서 지식의 양이 더욱 많이 축적돼 왔기 때문이다.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를 돌아볼 때, 상이한 두 분야에서 성취를 이룬 대표적 지식인으론 이용희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국제정치학과 미술사에서 선명한 자취를 남겼다.

이용희의 호는 동주(東洲)다. 그는 국제정치 연구에선 이용희라는 본명을, 미술사 연구에선 이동주라는 필명을 주로 사용했다. 2017년 이용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동주 이용희 전집’ 전10권이 출간됐다. 국제정치학 저작이 6권이고, 미술사 저작이 4권이다.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겐 국제정치학자로, 미술사를 공부하는 이들에겐 미술사가로 기억되는 ‘르네상스 지식인’이 바로 이용희다.

여기서 주목하는 이용희는 국제정치학자로서의 정체성이다. 무릇 학문의 발전에서 주목할 것은 제도와 사상이다. 이용희는 1956년 서울대에 외교학과를 설립하고 한국국제정치학회를 창립해 분과 학문으로서의 국제정치학을 제도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맡았다. 동시에 그는 1962년 ‘일반국제정치학 (상)’ 등을 발표함으로써 학문 담론으로서의 국제정치학을 체계화하는 데 중요한 기초를 세웠다.

◇국제정치학자이자 미술사가

이용희는 3ㆍ1운동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인 191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3ㆍ1운동을 언급한 것은 그의 부친이 3ㆍ1독립선언 33인의 한 사람인 독립운동가 이갑성이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아들이라는 특수성은 이용희의 성장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사학인 중앙고보를 다녔고, 역시 사학인 연희전문학교에서 언어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연전을 졸업한 다음 이용희는 만주로 건너가 만철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역사와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일반국제정치학(상)’의 말미에 실린 연보를 보면, “주관심이 정치사회문제로 집중되어 영국의 정치학, 불란서의 헌법학, 독일의 국가학 등을 읽고 비교하면서 일본 정치학이 구미 정치학의 아류이며 각국의 정치학은 일반 정치학이 아니라 자기 정치학을 합리화하는 이론”임을 깨달았다고 적혀 있다.

광복 이후 이용희는 1948년부터 서울대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1949년 정치학과 조교수가 됐고, 앞서 말했듯 외교학과를 만들고 국제정치학계를 이끌었다. 그는 이 시기에 ‘국제정치원론’(1955), ‘정치와 정치사상’(1958), ‘일반국제정치학(상)’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국제정치학자로서의 이용희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저작들이다.

이채로운 것은 이용희가 1960년대 후반부터 미술사가로 활동했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 그는 오세창을 통해 우리 회화를 보는 안목을 길렀고, 이러한 역량을 바탕으로 주목할 책들을 연달아 출간했다. ‘한국 회화소사’(1972), ‘일본 속의 한화’(1972), ‘우리나라의 옛 그림’(1975)을 펴냈고, 이어 ‘한국 회화사론’(1987)을 내놓았다. 어떤 이들에겐 국제정치학자 이용희보다 미술사가 이동주가 더 친숙했다. 나의 경우도 국제정치학자 이용희보다 미술사가 이동주를 먼저 알게 됐다.

인물화의 대가 김호석 화백이 그린 동주 이용희. 연암서가 제공
인물화의 대가 김호석 화백이 그린 동주 이용희. 연암서가 제공

이용희가 상아탑 안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75년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맡았고, 1976년에서 79년까지 국토통일원장관으로 일했다. 일흔이 넘었는데도 ‘미래의 세계정치’(1993)를 발표했고,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1996)을 출간했다. 국제정치학자이자 미술사가라는 두 정체성으로 살아온 그는 1997년 세상을 떠났다.

◇한국적 국제정치학의 확립

이용희 국제정치학의 출발을 알려주는 저작은 ‘국제정치원론’이다. 이용희는 “본래 내가 품게 된 정치학의 관심은 우리 겨레가 왜 이렇게도 취약하냐 하는 의문을 내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어 “내 정치학은 내가 살고 있는 고장 또 내가 그 안에 살고 있게 되는 나라의 운명과 무관할 수는 도저히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용희의 문제의식은 우리가 왜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았는지의 질문에 있었다.

이러한 탐구를 위해 그는 국제정치 현상, 국제정치학 성립, 근대국가 이해, 현대국가에의 지향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정치의 정태와 동태를 설명한다. 이 저작에서 주목할 것은 ‘장소의 논리’다. 이용희는 국제정치를 장소의 논리로 읽어야 한다는 이론을 내놓는다.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서양 국제정치학이 장소에 구속받는 특수 국제정치학이고, 따라서 우리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는 큰 도움을 안겨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반국제정치학(상)’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확장ㆍ심화하고 있는 책이다. 이 저작의 핵심 아이디어는 ‘권역’과 ‘전파’다. 이용희는 국제정치를 유교권ㆍ이슬람권ㆍ기독교권 등의 권역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한 권역의 문명이 다른 권역으로 전파되면서 일어나는 순응과 저항 등의 다양한 변동이 국제정치의 역동성을 이룬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처럼 이용희는 서양 국제정치학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국제정치를 이론화하려고 했다. 그가 책 제목에서 ‘일반’이란 표현을 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동주 이용희 전집
동주 이용희 전집

국제정치학자 하영선은 ‘일반국제정치학(상)’이 갖는 의의를 네 가지 측면에서 요약한 바 있다. 주체적 입장에서의 국제정치학 모색, 장소의 논리에 기반을 둔 독창적인 국제정치학 이론의 추구, 군사국가ㆍ경제국가ㆍ식민지국가 등 근대국가의 역사적 성격 탐색, 우리나라의 나아갈 방향 탐구가 그것들이다. 아쉬운 점은 서문에서 (하)권의 집필을 예고하고 있음에도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제정치학자 이용희가 지식사회에 매우 유명했지만 시민사회에 널리 소개됐다고 보긴 어렵다. 미술사가 이동주가 외려 더 많이 알려졌다. 현대 한국 지성사에서 이용희는 국제정치학의 토대를 마련했고, 무엇보다 한국적 국제정치학의 확립을 추구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이용희의 국제정치학은 다소 소박하고 지나치게 포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체적 관점에서 국제정치를 읽어내고 대응해야 한다는 그의 학문적 방법과 이론은 새로운 100년으로 가는 한국 사회과학의 한 출발점을 이룰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세계정치의 미래

이용희는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서울대 외교학과 대학원에서 연속 특별강의를 했다. 그 강의에 기반한 책이 ‘미래의 세계정치’(1993)다. 그는 유럽연합이란 국가연합이 기존의 국민국가를 대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초국가주의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체제는 (...) 내부에 지역적 다양성 혹은 민족적 다양성을 가지면서도 초국가적인 체제를 가지고 그 위에 또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를 정부간주의에 의해서 유지되는 그런 체제로 나아가는 모델을 만들어낼 경우에, 아마도 내 생각에는 이러한 모델을 선도하는 몇 나라가 결국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용희의 전망은 날카로웠다. 오늘날 세계정치는 지구적ㆍ지역적ㆍ국민국가적ㆍ국지적 차원에서 복합적으로 진행되며, 이 차원들 사이의 갈등 및 협력이 존재한다.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에서 동북아에 깊게 뿌리내린 단일 민족주의가 역기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용희의 우려는 경청할 만하다.

이용희가 어떤 지식인이었는지를 생생히 담은 저작은 하영선의 ‘역사 속의 젊은 그들’이다. 이 책은 18세기부터 현재까지 열강들 속에서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을 고민한 지식인들의 국제정치 사상을 주목한다. 영ㆍ정조 시대 박지원에서 최근 복합파까지 다룬 이 저작에서 특히 내 시선을 끈 것은 ‘동주 이용희와 한국 국제정치학’이다. 하영선은 말한다.

“한반도와 (...) 동아시아가 겪을 운명에 대해 미국이나 중국이 잘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는 기대는 무리입니다. 미국은 상대적 쇠퇴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새로운 해결책을 찾아 땀을 흘리고 있지만 전망은 불투명합니다. 단기간에 비대해진 중국은 스스로 당황해서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진 해법으로 문제를 풀려는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작은 거인으로서 우리도 본격적 고민을 해야 할 중요한 때입니다.”

세계정치와 경제에서 한국이 당당한 작은 거인으로 활동하는 것은 지난 19세기 후반부터 우리 모두가 품어온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초강대국들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민족과 나라의 활로를 어떻게 모색할 것인지는 우리 학문과 정치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나혜석의 ‘나혜석 전집’이 소개됩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