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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에서 악기제작자 변신… 두 우물 파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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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니어에서 악기제작자 변신… 두 우물 파고 싶었죠”

입력
2018.11.17 04:4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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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악기 제작자 이성열씨 

 40대 초반이었던 2005년 伊유학 

 5년 과정을 3년 만에 수석 졸업 

 지난 5월 獨콩쿠르 첼로부문 2위 

 “열심히 만들면 1년에 3대 제작 

 수제 악기 비쌀 수밖에 없어요” 

그림 1 이성열 씨는 "현악기 수리와 제작을 병행할 때 좋은 점이 많다. 수리하면서 연주자들이 좋아하는 악기 스타일, 소리를 알 수 있어 악기 제작할 때 반영할 수 있다. 악기를 구입한 연주자들은 제작자가 수리를 병행하기 때문에, 최상의 상태로 악기를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그림 1 이성열 씨는 "현악기 수리와 제작을 병행할 때 좋은 점이 많다. 수리하면서 연주자들이 좋아하는 악기 스타일, 소리를 알 수 있어 악기 제작할 때 반영할 수 있다. 악기를 구입한 연주자들은 제작자가 수리를 병행하기 때문에, 최상의 상태로 악기를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조성진, 임지영, 선우예권, 양인모.

최근 2,3년 사이 세계적인 연주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들은 한국 클래식 음악계를 ‘콩쿠르 강국’ 반열에 올려 놓았다. 44년 전, 피아니스트 정명훈이 차이콥스키 국제음악 콩쿠르에서 2위로 입상하고 서울 시내 카 퍼레이드까지 벌였을 만큼 생소했던 국내 클래식 음악계를 감안하면 격세지감이다. 웬만한 대회 수상 성적만으로는 단신 보도 처리도 어려운 게 국내 클래식 음악계의 현주소다.

고무적인 건 ‘콩쿠르 강국’으로 올라선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서 연주만큼이나 악기 제작 분야의 성장 또한 눈부시다는 점이다. 재작년 현악기 제작가 박지환(36)씨가 폴란드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바이올린 제작 부문 1,2위를 석권한 데 이어 올해 9월엔 정가왕(28)씨가 이탈리아 크레모나 국제 현악기 제작 콩쿠르에서 첼로 부문 우승을 차지했다.

서울 신사동에서 공방 '이성열스트링랩'을 운영하는 이성열씨도 올해 5월 세계 3대 현악기 제작 콩쿠르 중 하나인 독일 미텐발트 콩쿠르 첼로 부문에서 2위를 수상, 장인 반열에 합류했다. 10년차 현악기 제작가인 그의 나이는 57세. 그가 세계 최대 슈퍼컴퓨터 제조사 크레이의 한국인 시스템 엔지니어였다는 점은 이색적이다. 6일 공방에서 만난 이씨는 "인생을 딱 반으로 나눠 '두 우물'을 파고 싶었다”며 “엔지니어로 일할 만큼 했다 싶었던 40대 중반에 다른 우물을 찾았다"고 말했다.

사실 공학도에서 악기 제작가로의 깜짝 변신은 그의 내면 속에 잠재됐던 또 다른 재능에서 비롯됐다. 과학과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한양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고 당시 막 도입됐던 컴퓨터 프로그램에 꽂혔다. 컴퓨터공학과가 없었던 그 무렵엔 전자공학과에서 컴퓨터를 가르쳤다. 졸업 이후, 그가 컴퓨터 업체에 입사한 것도 당연했다. "100년 전 대학 기술력의 척도가 현미경 배율이었는데 제 대학 때, 기술력 척도는 슈퍼컴퓨터 성능이었죠. 교과서에서 크레이를 보면서 '이런 회사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꿈꿨는데 1988년 카이스트에 국내 처음으로 슈퍼컴퓨터 크레이가 들어왔습니다. 거기서 엔지니어로 12년을 일했죠." 그가 컴퓨터 업계에서 모두 19년을 일한 배경이기도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직장인 오케스트라에서 첼리스트로 활동했고 틈틈이 클래식 음반도 수집했다. 그의 인생 2막이 시작된 접점이기도 했다.

현악기 장인 이성열씨가 6일 강남구 신사동 공방 작업실에서 제작한 악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현악기 장인 이성열씨가 6일 강남구 신사동 공방 작업실에서 제작한 악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한 기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며 다른 우물을 찾기 시작한 건 40대 초반. 음악과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는 기질을 고려하니, 다음 직업은 자연스럽게 악기 제작가로 낙점됐다. "미국, 독일에도 좋은 현악기 제작학교가 있어요. 한데 그때 만났던 제 주변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탈리아를 가라고 하더라고요. 마흔 넘어 외국어를 새로 공부하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아내가 '이왕 시작할 거면 빨리 유학 가라'고 응원해주더군요."

아내의 응원은 힘이 됐고 그의 발걸음을 2005년 이탈리아 크레모나로 향하게 했다. 이 곳은 현악기 제작의 바이블로 꼽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가 활동했던 곳이다. 학구열도 불태웠다. 초등학교 6학년생과 갓 두 돌 지난 아이 둘을 떼어놓고 떠난 유학이었기에 그는 이를 악물었다. 덕분에 5년 과정을 3년 만에 수석으로 끝냈다. 이피알(IPIALL) 현악기제작학교를 졸업한 그는 칼슨 앤 노이만 공방에서 2년 간 실전도 익혔다. 매주 도서관에 들러 클래식 월간 전문잡지 '스트라드'의 악기 제작가 연구 기고를 복사했고, 밥값까지 아껴가면서 악기 제작에 쓸 목재를 샀다. “목재는 미리 준비할수록 좋아요. 마르고 뒤틀릴 대로 뒤틀린 다음 깎기 시작해야 악기로 만든 다음 변형이 덜 거든요.” 그가 좋은 나무를 볼 때마다 구입한 이유였다. ’70~80년 분량의 스트라드 악기 제작 연구 기고를 복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2009년, 그의 귀국 이삿짐 40상자 가운데 35상자는 나무로 가득 찼다.

그는 현악기 제작의 어려운 과정도 소개했다. “1년에 열심히 만들면 바이올린 한 대, 비올라 한 대, 첼로 한 대 만들 수 있어요. 저 큰 나무를 일일이 깎아 앞판 뒤판을 만드는 거거든요. 첼로는 하루 8시간 꼬박 일해도 한 대 만드는 데에 4,5개월 정도 걸리죠." 현악기가 고가에 팔리는 이유였다. 해외에서 반가공한 제품을 들여와 니스 칠만 해 '수제'로 내놓는 제품이나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악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현악기 고르는 요령은 덤으로 귀띔했다. "17,18세기 '올드(old) 악기'로 보이는 것 들 중에도 부실한 제품이 있습니다. 현악기 만든 시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만듦새와 건강상태가 중요합니다."

사실 국내 현악기 시장에서 이씨처럼 악기 수선과 제작을 병행하는 전문 인력은 드물다. 만든 지 200~300년 된 올드 악기의 선호가 강하다 보니, 악기 수리 위주의 제작가들이 대부분이다.

현악기 관한 한 국내에선 장인으로 통하지만 그는 현재 집에서 가까운 곳에 간판도 없이 공방을 열었다. 지인 소개로 만난 연주자 2명에게 악기를 팔고 수선도 시작하면서 입소문도 탔다.

보람도 크다고 했다. 미력하지만 한국의 현악기 시장에 대한 가치를 대외적으로 재확인시켰기 때문이다. “최근 악기 트렌드와 제가 만든 악기에 대한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어요. 지난 5월 2위에 오른 독일 미텐발트 콩쿠르 첼로 부문 출전도 그런 이유였습니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한국인 현악기 제작자가 있다는 사실을 국내외에 알리게 돼 기뻤습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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