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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귤상자에 귤만 있을까

입력
2018.11.16 16:37
수정
2018.11.16 17:2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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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 배같이 제법 무게 있는 과일을 담는 상자는 튼튼해서 과일 아닌 것을 담는 용도로 유용하게 쓰인다. 흔하게 사서 먹는 사과 상자가 대표적이다. 물건을 담아두는 수납함 대신 쓰기도 하고 이삿짐 꾸릴 때도 도움 된다. 특히 책을 담아서 옮기기엔 그만이다. 그러나 무거운 물건을 담아도 무리 없을 정도로 견고하고 겉으로는 누가 봐도 수수한 선물이라는 위장 효과 때문에 지폐 다발을 쟁여 넣는 수단으로도 애용됐다.

▦검은돈 전달 수단으로 사과 박스가 각광받은 것은 1993년 금융실명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전까지 고액권 수표나 차명계좌 통장 건네던 수법을 현금으로 바꿀 수밖에 없자 이를 담을 그럴듯한 박스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즈음부터 재벌총수 집에서 현금을 담은 사과 상자가 대량으로 발견되었거나 실제 뇌물 전달에 사과 박스를 쓴 사례들이 들통 나면서 ‘사과 박스=뇌물 박스’라는 통념까지 생겨났다. 2003년 대선 때 한나라당 쪽에서 이런 현금 상자를 트럭째 받은 것은 뇌물 박스의 전무후무한 진화로 회자된다.

▦그 뇌물 박스에 2009년 이후로 작은 변화가 생겼다. 5만원권 발행의 영향이다. 10㎏ 사과 박스 한 상자에 1만원권 지폐를 가득 넣으면 약 3억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지폐를 5만원권으로 바꾸면 단번에 15억원을 뇌물로 전할 수 있다. 하지만 한 차례 뇌물치고는 액수가 많다 보니 5만원권을 쓰되 사과 박스보다 작은 다른 박스를 이용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가로 50㎝ 세로 30㎝ 사과 박스보다 훨씬 크기가 줄어드니 이용에는 더 편리하다. 성완종 사건에서 화제가 된 비타500박스 같은 사례다.

▦정부가 북한에 귤을 보낸 것을 두고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귤 상자 속에 귤만 들어있다고 믿을 국민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수억 달러를 북에 송금한 전력” 운운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런데 홍 전 대표 말대로 그 상자 안에 귤만 들어있지 않았을 거라고 믿는 국민이 의외로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이 추측하는 다른 내용물은 “남북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 “김정은 연내 답방에 대한 소망” 같은 것들이다. 상자를 열어 본 북한은 16일 귤 말고도 “남녘 동포들의 뜨거운 마음”(조선중앙통신)이 들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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