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 쓰면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터미네이터처럼 본다
영화 ‘터미네이터’의 한 장면. 터미네이터의 전자 눈으로 보는 세상은 실제 사람과 그 사람과 관련된 정보가 겹쳐 표시된다.

허름한 술집에 들어선 주인공이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관찰한다. 손님들과 눈이 마주치면 그 사람의 성별, 키 등에 대한 정보가 펼쳐진다. ‘매치’(MATCH). 당구대 옆에서 몸무게, 목둘레, 어깨너비까지 자신의 체형과 꼭 맞는 사람을 발견하자 그 사람이 입고 있던 옷을 빼앗아 버리는 주인공. 1984년 제작된 공상과학 영화 ‘터미네이터’의 장면이다. 눈앞에 표시되는 정보로 살해 목표도 찾는 터미네이터의 눈은 현실 세계 위에 가상 정보를 덧입혀 주는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ㆍAR)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는 아주 좋은 예시가 됐다.

그리고 지난 2016년 미국 AR 장비 개발사 매직리프는 물 한 방울 없는 학교 체육관 바닥에서 거대한 고래가 튀어 오르는 걸 촬영한 영상을 공개해 충격을 줬다. 체육관에 있던 아이들은 탄성을 내지르며 실제 물이 튀기라도 한 듯 몸을 뒤로 젖혀댔다. SK텔레콤에서 ARㆍVR 랩을 이끄는 전진수 리더는 AR 연구자들의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짜와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하는 거죠. 현실과의 괴리감을 최소화해 나도 모르게 손을 뻗게 될 정도로요.”

2016년 미국 증강현실(AR) 스타트업 매직리프가 자사 기술력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동영상의 한 장면. 고래는 가상으로 만든 이미지이지만 실제 체육관 바닥에서 튀어 오르는 것처럼 구현된다.
◇스마트폰 필수 기능이 된 AR

사방이 막혀있는 기기를 머리에 쓰고 완전한 가상의 공간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는 가상현실(VRㆍVirtual Reality)과 달리, AR는 사람이 서 있는 현실에 가상을 겹쳐 보여준다. 벽이나 모서리에 부딪힐 걱정이 없어 현실과 괴리가 VR보다 적지만, 동시에 사람이 보고 있는 현실과 섬세하게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까다롭다.

AR는 △디바이스 △트래킹 △렌더링 △인터랙션 △콘텐츠 △네트워크로 구성된다. 사람에게는 터미네이터의 눈이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 카메라처럼 현실과 가상을 동시에 비춰 줄 기기(디바이스)가 있어야 하고, 이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바라보는지 아주 정교하게 추적하는 트래킹 기술이 받쳐줘야 한다. 각속도(시간당 회전하는 각도)를 측정하는 자이로 센서 등을 활용해 어떤 각도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아야 적합한 가상 콘텐츠를 시선이 머무는 곳에 띄워줄 수 있다.

렌더링은 빛을 다루는 영역이다. 그림자 효과는 물론 현실 방 안의 불이 꺼지면 가상 이미지도 같이 어두워지거나 꽃밭에 떠 있는 가상 이미지에 꽃의 화려한 빛깔들이 자연스럽게 반사되는 등 더 현실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용자가 가상의 이미지를 터치하거나 음성명령을 내리면 다음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는 게 인터랙션, 가상 이미지에 담아내는 게 콘텐츠, 일련의 과정이 끊김 없이 이어지도록 하는 게 네트워크에 해당한다.

전진수 리더는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이 맞은편에 앉아있는 친구를 보고 있는 건지, 친구 너머 벽에 있는 메뉴판을 보고 있는 건지도 트래킹이 가능해야 하는데, 아직 일상에서 이 정도로 정교한 AR를 즐기긴 어렵다”며 “현재는 일상적으로 들고 다니면서 AR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기초적 AR가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출시된 LG V40씽큐를 포함해 프리미엄 스마트폰에는 실제 사람의 얼굴을 본떠 가상의 캐릭터로 만들어 주는 AR이 기본 탑재되고 있다. V40씽큐 AR 담당 개발자는 “사람의 얼굴형, 눈, 코, 입 등 특징과 움직임을 인식해 표정을 따라 하는 기능을 오락용으로 제공하고 있다”며 “머지않은 미래에 AR쇼핑, AR내비게이션 등 카메라를 통한 현실에 더 많은 시각 정보를 입힐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차세대 AR 하드웨어는 ‘안경’

‘AR 글라스’ ‘스마트 글라스’ 등으로 불리는 AR 안경은 터미네이터의 눈 못지않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는 차세대 하드웨어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세계적 기업들이 도전장을 던졌지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 구글은 2015년 구글 글라스 프로젝트를 조용히 접었고, MS의 홀로렌즈는 소수 개발자에게 판매됐지만 3,000달러에 달하는 가격과 시판용 제품으로 보기엔 부족한 기술적 한계를 지적받고 있다.

스마트폰처럼 별도 기기를 손에 들 필요 없이 앞을 보면서 AR를 즐기려면 안경 형태가 가장 좋지만, 좀처럼 현실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 가까이에 있는 물체는 초점을 잡기 힘든 없는 인체의 특징 때문이다. 안경 자체에 콘텐츠를 띄우는 디스플레이를 넣어 봤자 사람은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일정 거리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구글 글라스는 ‘하프미러’(반투명거울) 원리를 이용했다. 눈앞 렌즈에 45도 각도로 기울어진 하프미러를 설치하고 측면에 달린 프로젝터가 빔을 쏘는 방식이다. 50%는 현실 세계를 보면서 나머지 50%는 하프미러에 반사된 가상 이미지가 겹쳐 보이게 된다. MS 홀로렌즈는 바깥 현실이 그대로 투과되는 동시에 특정 파장만 반사하는 얇은 홀로그램 필름을 이용하는 홀로그래픽 광학 소자(HOE) 방식이다. 역시 측면 디스플레이에서 전송하는 이미지만 골라 반사한다.

하지만 이 방식들은 일단 복잡한 광학 솔루션을 기반으로 해 무겁다. 큰 이미지를 보여주려면 큰 반사면이 필요해 제품이 더 크고 더 무거워지며, 1.5~3m 사이 특정 거리에 고정해 초점을 맞춰 가상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현실 세계 물체를 동시에 보는 게 힘들다.

최근 국내 스타트업 레티널이 네이버, 카카오 등으로부터 40억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한 건 기존 방식과 전혀 다른 접근법으로 AR 안경 상용 가능성을 높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레티널은 ‘핀홀(아주 작은 구멍) 효과’를 활용한다. 바늘구멍만 한 구멍을 내고 나머지를 모두 가리면 무수히 많은 빛 중 구멍을 통과하는 빛만 상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뚜렷하게 맺힌 상을 볼 수 있다. 우리가 멀리 있는 글자가 잘 안 보일 때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려 나머지 빛을 차단하려는 것으로 핀홀 효과가 무의식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아주 작은 거울이 들어가 있는 렌즈(왼쪽)에 눈을 갖다 대면 뚜렷하게 가상 이미지가 반사돼 눈앞에 나타난다. 레티널 영상 캡처

이 구멍 대신 초소형 거울(핀미러)을 이용해도 뚜렷하게 이미지를 반사해낼 수 있다는 걸 발견한 김재혁 레티널 대표가 AR 글라스 개발에 뛰어들었다. 레티널 제품은 안경 위쪽 디스플레이에서 쏘는 이미지가 안경 렌즈에 들어가 있는 티끌만 한 핀미러에 반사돼 망막까지 전해진다. 핀미러가 동공보다 작은 4㎜ 안팎이고, 글라스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사람 눈에 거슬리지도 않고 구동 방식도 간단하다.

하정훈 레티널 기술이사는 “뚜렷하게 반사하는 원리로 인해 색표현이 분명하고 아주 간단한 원리를 이용하기 때문에 소형ㆍ경량화가 가능하다”며 “플라스틱 렌즈로 대량생산도 할 수 있어 국산 기술로 AR 안경 상용화가 한층 가까워졌다”고 밝혔다.

완성도 높은 AR 안경 개발 경쟁은 점점 치열해지고 있다. 애플은 8월 AR 안경용 렌즈 제조업체 아코니아 홀로그래픽스를 인수했고 페이스북도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화웨이는 1, 2년 안에 완성품을 내놓겠다고 발표했다. 시장조사업체 IDC는 머리에 쓰는 형태의 AR 기기가 2022년 판매량 2,100만대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했다.

맹하경 기자 hkm0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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