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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폭로자의 다짐 “권력형 성폭력은 제도의 문제… 끝까지 싸워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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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폭로자의 다짐 “권력형 성폭력은 제도의 문제… 끝까지 싸워야죠”

입력
2018.11.15 04:4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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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력 산재 신청한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 

 학교 측은 학교 이미지만 걱정 

 직접 민형사 1심 가해자 패소 이끌어 

미투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도 같은 선택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는 “당연하다. 좀더 일찍 이 운동을 시작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미투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도 같은 선택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는 “당연하다. 좀더 일찍 이 운동을 시작하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고영권 기자

성균관대 재직시절 동료 교수의 성추행을 폭로하며 ‘대학가 서지현’으로 불린 남정숙(56) 전 문화융합대학원 교수가 지난 8일 근로복지공단에 산업 재해를 신청했다.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 운동’이 단순 폭로를 넘어 제도개선 운동으로 넘어가는 신호탄으로 읽힌다.

12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남 전 교수는 “대학 내 성폭력으로 정신적, 육체적 상해를 입었다. 대학의 폐쇄적이고 불공정한 노동 환경에서는 언제든 같은 이유로 산업 재해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직장 내 성폭력은 갑의 역할과 업무, 책임을 을에게 전가하기 위한 조련의 하나”라며 “이를 예방하지 못한 조직과 국가에 책임이 있다. 개인의 잘못보다 사회적 위험으로 봐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남 전 교수가 산재를 신청한 이유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경현 전 성균관대 교수는 민형사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

국내 1세대 문화마케팅 전문가인 남 전 교수는 2004년부터 성균관대에서 관련 강의를 맡았고, 2014년 대학이 문화융합대학원을 개원하며 전임대우교수로 발탁됐다. 같은 해 4월 열린 학과행사(MT)에서 원장인 이경현 전 교수는 남 전 교수를 강제로 껴안고 ‘우리 둘이 오늘 같이 잘 테니까 우리 방은 따로 준비하라’고도 말했다. “요만큼 참으면 된다는 생각”에 이 일을 덮은 지 열 달이 지난 2015년 2월, 대학원 학생 2명이 남 전 교수와 자신이 당한 성폭력 피해를 성균관대 성평등상담실에 익명 투서하면서 조사위원회가 열렸다. 남 전 교수는 더 이상 참지 않고 피해 사실을 밝혔다. “제 눈 앞에서 학생들이 조사를 받는데, 너무 부당하더라고요. 가해자는 제가 학생 데리고 꾸민 일이라고 하고, 위원회는 학교 이미지 걱정하고, 총장과 재단이사장은 묵인하고. 가해자가 진정 반성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남 핑계대면서 잘못했다는 말을 안 하는 걸 보고 ‘바뀔 분이 아니구나, 그럼 나이 먹은 내가 나서야겠다’고 생각했죠.” 익명 투서 접수 5개월만인 7월 가해자 이 전 교수는 정직 3개월에 처해졌고, 그 해 12월 피해자 남 전 교수는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다.

이 사연은 올 초 미투 운동이 확산되며 다시 언론에 호출됐다. 남 전 교수는 서지현 검사에 이어 두 번째 미투 피해자로 JTBC 인터뷰를 한 다음날부터 ‘나도 피해 생존자’라며 도와달라는 연락을 하루에 십여 통씩 받았다. 남 전 교수는 “전국에 성폭력 피해자가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 사연을 모아보니 ‘권력형 성폭력’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성폭력 발생 상황, 이후 2차 가해, 피해자에 대한 낙인, 법원에서의 다툼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남 전 교수도 이 ‘패턴’을 경험했다. 학교와 학회에는 ‘남 씨가 정규직 교수 자리를 노리고 학생들을 사주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폭로 기사에는 ‘저렇게 뚱뚱하고 나이든 여자를 성추행하냐’는 식의 외모 품평, 비아냥 댓글이 주렁주렁 달렸다.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 고영권 기자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 고영권 기자

올해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이 전 교수가 피해자에게 700만원을 배상하고(민사 1심), 벌금 700만 원을 내라고(형사 1심) 선고했다. 사립학교법에 따르면 성폭력 범죄로 100만원 이상 벌금형을 받은 사람은 ‘당연 퇴직’, 징계절차 없이 파면되지만 이 전 교수는 판결 직후 사표를 냈고 성균관대는 이를 수리했다. 이 전 교수는 지난 달 26일 항소심에서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 8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명령을 선고 받았다.

변호사인 동생까지 ‘백전백패니까 절대 시작하지 말라’고 했던 재판에서 이긴 남 전 교수는 “내 사연은 미투 생존자 중 상위 0.1%에 드는 운 좋은 케이스”라고 말했다. 이 송사를 무료 변론한 한국여성변호사회소속 변호사는, 자주 울먹이는 남 전 교수에게 “피해자 99%는 소송까지 가지도 못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저는 전문직으로 편안하게 살아온 사람이고, 이제껏 사회적 지원도 많이 받았잖아요. 이렇게 혜택 받은 걸 되돌려줘야겠다, 특히 제 피해 경험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올 3월 전국미투생존자연대를 만든 이유다. 피해자와 지지자, 지원자를 회원으로 한 이 연대는 미투 피해자의 진술서 작성을 돕고, 관련 법률 또는 심리치유 전문기관을 연결해준다. 남 전 교수는 “성폭력 관련 상위법과 하위법이 상반된 경우가 많아, 피해가 인정되고도 가해자 처벌이 미비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성폭력 관련 대법원 판결은 보통 5년 이상 걸리는 데, 대부분 공공기관 성폭력 가해자 처벌 시효는 사건 발생 후 2년으로 제한돼있어요. 1심에서 피해자가 승소하면 관련 조직은 대법원에서 확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가해자 징계를 미루는데, 대법원 판결이 나면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징계하지 않는 거죠.”

남 전 교수는 공황장애와 우울증 6개월, 의식소실(공황장애 발작)로 인한 인대파열 6주 진단을 받았다. 그는 “성폭력이 반복되는 건 제도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정신적 상해로 인한 ‘근로능력 상실’이 아니라 성폭력 피해 자체를 산재로 인정받는 게 목표다. “직장 내 성폭력이 범죄라는 인식이 있었다면 애초 학교 진상조사에서 어디 감히 카르텔이 만들어졌겠어요. 제도를 바꿀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해 끝까지 가볼 겁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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