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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다산독본] 다산 “정조ㆍ채제공 있을 때 곪은 종기 터뜨리자” 이치훈 설득

입력
2018.11.15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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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반격과 반전 

 홍낙안 투서 자체로 초점 옮겨가고 

 이치훈 “서학책 본 적 없다” 잡아떼 

규장각 각신 시절의 다산. 진산사건 처리 문제로 조정이 대립할 때 다산은 천주학 관련 사실을 드러내 논쟁을 끝내자고 제안했다. 김옥희 수녀 제공, 탁희성 화백 그림.
규장각 각신 시절의 다산. 진산사건 처리 문제로 조정이 대립할 때 다산은 천주학 관련 사실을 드러내 논쟁을 끝내자고 제안했다. 김옥희 수녀 제공, 탁희성 화백 그림.

 ◇악화되는 상황 

채제공은 무엇보다 홍낙안의 태도를 참기 힘들었다. 직접 상소로 올려도 될 일을, 자신에게 공개질의서 비슷한 장서로 보냈을 뿐 아니라 그 사실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글도 의도적으로 여러 사람의 손을 타고 옮겨지고 있었다. 채제공은 가급적 이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어떤 경우에도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조상의 신주까지 불태운 패륜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의 처단으로 끝날 문제도 아니었다. 윤지충은 다산과 사촌 간이었고, 이승훈과도 가까웠다. 채제공은 다산 집안과 새로 사돈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은 채당의 주축 중 하나였다. 불똥이 이들에게까지 튈 경우 최종 공격의 화살은 자신에게로 집중될 것이 명백했다. 저들의 말을 따르자니 자신의 손발을 제 손으로 자르게 생겼고, 홍낙안 등을 화심(禍心)으로 몰아 일벌백계하려니 천주학을 두둔한다는 소리가 바로 나올 판이었다.

10월 16일, 대사헌 구익(具㢞)과 정언 박윤수(朴崙壽) 등이 진산 사건의 조속한 처리를 요청하는 합계(合啓)를 올렸다. 조정 내부에서도 공론화의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 정조는 비답(批答)에서 이렇게 말했다. ‘윤지충 등의 일탈은 말단에서 발생한 문제라 나라 차원에서 대응할 문제가 아니다. 풍문으로 전해진 말을 다 믿기도 어렵다. 여기에 가증스레 많은 말들이 사단을 빚어내고 있으니, 이는 조정에서 엄금하려 하는 까닭이다. 태학 유생들의 본분을 벗어난 외람된 행위도 방치할 수 없다. 진산 일은 전라관찰사가 처리케 한다. 유생들이 통문을 돌려 사단을 만들려는 행동은 경고한다. 윤허하지 않는다.’

이튿날은 대사간 신기(申耆)가 다시 상소를 올렸고, 조회에 나온 대신들도 잇달아 문제를 제기했다. 임금은 원론적인 말만 되풀이 하며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사람은 사람으로 만들고 책은 불태워라 

채제공도 더 이상 침묵만 계속 할 수 없었다. 10월 20일, 채제공은 국왕 정조에서 진산 사건의 처리 방침을 구두로 보고했다. 윤리상의 변괴는 엄정하게 처리하되, 특별한 단서가 없는 사람에게 공격의 의도를 가지고 지목하여 해치려 하는 책동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보고했다.

이후로도 10월 23일에 지평 한영규(韓永逵)와 사간 이언우(李彦祐) 등이 잇달아 진산 사건의 조속한 처벌을 요청했다. 이때도 정조는 “홍낙안 등의 일은 사적인 편지의 문구를 가지고 물을 경우 나라의 체통과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별도의 노림수가 이 가운데 있는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며 불허의 비답을 내렸다. 개인 차원의 투서로 국가가 움직일 수는 없다. 게다가 이 가운데 모종의 협잡이 있는 듯하다. 이것이 당시 정조의 판단이었다.

10월 24일, 좌의정 채제공은 천주교도의 처리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한 차자(箚子)를 올렸다. 서두에서 채제공은 이 문제의 발단이 홍낙안이 자신에게 보낸 장서에서 비롯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이어 자신 또한 천주학을 원수처럼 미워해 글까지 지어 논변한 바 있다고 한 후, 이 문제를 처리하는 원칙은 당나라 때 한유가 이단 처리 지침으로 제시한 “그 사람은 사람으로 만들고, 그 책은 불태우며, 그 거처는 민가로 만든다(人其人, 火其書, 廬其居)”는 말을 기준으로 삼을 것을 말했다. 천주학 서적은 불태우고 신자들의 거처를 민가로 만들되, 그 사람은 죽이지 않고 정학(正學)으로 교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799년 2월 정조가 채제공에서 '문숙'이란 시호를 내린 교지. 문숙은 과단성 있는 채제공을 기리는 표현이다.
1799년 2월 정조가 채제공에서 '문숙'이란 시호를 내린 교지. 문숙은 과단성 있는 채제공을 기리는 표현이다.

어진 임금이 위에 계셔서 조정이 편안하고 성내에 시끄러운 일이 없는데도 홍낙안 등은 당장 큰 변란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떠들어 민심을 동요케 하고 있다. 이는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남을 침해하려는 책동으로 보이니,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정치를 밝혀달라고 청하였다.

 ◇이승훈의 반격과 권이강의 상소 

호남관찰사 정민시에 의해 진산의 두 사람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서울에서의 논의는 점점 홍낙안의 투서 행위 자체로 초점이 옮겨갔다. 정조와 채제공은 홍낙안의 돌출 행동이 고감대신(敲撼大臣), 즉 대신을 두드려 흔들려는 불순한 저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홍낙안은 장서에서 천주학을 믿는 자들이 관련 서적을 간행하여 중외에 널리 배포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10월 29일, 권이강(權以綱)이 상소를 올렸다. 그는 상소문에서 진산 사건과 천주학을 행하는 무리를 한껏 성토한 뒤에, 홍낙안의 장서 중에 책자를 간행했다는 말이 있으니, 이 일을 한 사람과 인쇄 시설이 설치된 장소를 찾아내 판목을 헐어 버리고 그 사람을 죽여 뿌리를 뽑고 근원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금은 비답을 내려, 권이강이 홍낙안의 장서에서 ‘간책(刊冊)’이란 두 글자를 잡아내어 조사를 청한 것을 사리에 맞는 말이라 칭찬하고, 정원(政院)에서 홍낙안에게 물어 천주학 서책의 간행자를 잡아내라고 명했다.

권이강의 상소는 노림수가 들어 있었다. 상소문은 천주학을 극력 비난하고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기실 그는 이승훈의 가까운 인척이었다. 홍낙안의 장서 가운데 책을 인쇄하여 배포했다는 주장은 확인된 사실이 아니었다. 권이강은 짐짓 천주학을 치는 체 하면서, 이 증거를 댈 수 없을 이 표현을 물고 늘어져 홍낙안의 주장 전체를 허망한 것으로 돌리려 했다. ‘벽위편’은 권이강의 이 상소가 이승훈 등과 미리 짜고 제출한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고발자인 홍낙안은 이제 죄의 증거를 자신이 직접 입증해야 하는 궁지에 몰렸다. 그는 다음날인 10월 30일 밤 12시경에 부랴부랴 답변서를 올렸다. 자신이 1788년 인일제에서 서학을 배척하는 글을 올린 이후, 서학의 무리가 자신을 원수로 여겨 상대조차 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어찌 그들의 깊은 사정을 알 수 있느냐면서, 자신도 한 달쯤 전 승지를 지낸 이수하(李秀夏)가 충청도 보령에서 올라와 한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라고 발뺌했다. 일껏 얘기해 놓고 증거를 대라니까 증거가 없다고 한 폭이어서, 홍낙안은 진땀이 났다.

 ◇물고 물리는 혼전 

다급해진 홍낙안은 이 답변서에서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 가서 천주교 서적을 들여온 일과, 1787년에 반촌에서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천주교 책을 함께 공부한 일을 이기경이 직접 보고 돌아와 탄식했던 일을 다시 끄집어냈다. 이승훈이라면 서적 간행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물고 들어갔다.

임금은 증거 없이 길거리의 풍문만으로 그런 말을 했느냐며 그 망령되고 경솔한 행동을 통렬하게 나무랐다. 또 그를 불러다가 사실을 반복해서 물어 조목조목 확인할 것을 명했다. 다산의 권유로 세상에 나와, 당시 평택 현감에 나가 있던 이승훈도 붙들어 와 신문하게 했다.

눌암기략 가운데 진산사건에 대해 기록한 부분.
눌암기략 가운데 진산사건에 대해 기록한 부분.

11월 3일, 이번에는 홍인호가 홍낙안의 편을 들어 상소를 올렸다. 이수하에게서 들은 말을 두루 적고 나서, 다시금 정미년 반회사건을 거론했다. 이기경에게 그 자세한 사정을 물어보면 간행의 증거는 아니라도 금서를 사사로이 감추어 둔 증거는 얻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 설령 사실이 아니라 해도 사사로운 편지에 적은 말에 착오가 있다 해서 대간이 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고 반발했다. 이어 안정복의 사위인 권일신이 천주교의 교주이고, 그의 세 아들도 외조부인 안정복의 장례에조차 참석하지 않는 패륜을 일삼았음을 고발했다.

홍낙안이 신서파 남인을 저격하자, 이치훈과 다산은 맞불 작전으로 집단행동을 막았다. 이어 권이강을 내세워 홍낙안의 말을 꼬투리 잡아 그가 지극히 허망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반격했다. 그러자 다시 홍인호가 나서서 이기경을 끌어들이고, 다시 이승훈과 권일신을 교주의 명목으로 연좌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 문제는 남인끼리 물고 물리는 수렁의 혼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양측 모두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다산과 이기경의 긴 악연 

결국 이기경이 불려왔다. 그는 대답 과정에서 정미년에 반회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이기경은 자신도 정미년 겨울에 이승훈과 함께 서양서를 함께 보았고, 책 속에 좋은 내용도 있었지만 이치에 어긋나고 윤리를 해치는 말이 많아 이후 이를 배척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 자신이 홍낙안에게 이 일을 얘기한 적은 있으나 증거를 서준 것이 아니라, 친구 사이에 옳은 일을 권하는 의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이승훈과 다산을 보호해 주었다.

‘사암연보’에서는 이기경이 이렇게 진술하고 물러나와 바로 다산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대답한 내용을 전달하고, 이 대답을 가늠해서 함께 이 문제를 풀어 나가자고 했다고 적고 있다. 내가 너희에 대해 좋게 말했으니, 여기에 발 맞춰서 대응하라는 취지였다. 다산은 이기경의 편지를 받은 뒤 바로 이승훈의 동생 이치훈을 불러 그 말을 전했다. “반회에서 서학 책을 본 것은 사실이니 심문에 나아가서는 사실대로 대답해야지, 임금을 속여서는 결코 안 되네.”

이치훈의 생각은 달랐다. “밀고한 자가 이미 자수를 한 셈이 아닌가? 옥사(獄事)와 관련된 말은 비록 사실과 어긋나더라도 임금을 속인 것은 아닌 것일세.”

다산이 말했다. “그렇지 않네. 밀고가 바른 일은 아니지만, 옥사에 올리는 말은 임금께 고하는 것일세. 조정에서는 진술한 말만 볼 테니, 거실(巨室)과 명족(名族)이 집집마다 모여 의논하는 것은 두려운 일일세. 지금은 거룩한 임금께서 위에 계시고, 훌륭한 재상이 다스림을 돕고 계시니, 이러한 때 곪은 종기를 터뜨려 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나중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일세.”

하지만 이치훈은 다산의 말을 듣지 않았다. 형 이승훈의 문제로 대답하면서, 반회에서 천주학 서적을 읽었다는 것은 이기경의 무고이고, 애초에 그런 사실 자체가 없었다고 딱 잡아떼 무죄로 석방되었다. 애써 후의를 베푼 이기경은 이 일로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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