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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집에서 패션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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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집에서 패션쇼를 했다

입력
2018.11.14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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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에서 패션쇼를 해도 될까요?”

방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집주인에게 부부모임의 공동 카톡방에서 허락을 구했다. 다른 사람들의 동의도 기대했다. 수년 째 모임을 식당에서 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집으로 초대한다는 말에 불쑥 떠오른 생각이었다. 영문도 모르면서, “빈방 많습니다. 등이 훤~히 파진 옷으로 준비해오세요”라는 집주인의 환영과 “학수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박수와 환호 준비해가요”라는 사람들의 응원까지 받고나니, 나는 신이 났다.

입지 않는 옷들이 옷장만 차지하고 있는데도, 정리에는 과감함이 필요했다. 여태 없었던 본전 생각이 굴뚝 같이 올라오면서, 좋아하고 아낀다는 애착심과 언젠가는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비축심리 같은 것들이 뒤섞여 방해를 했다. 기어코 체중을 줄이겠다는 단단한 결심과 다시 입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헛된 것임을 인정해야 했다. 세월 따라 나의 모습도 취향도 달라졌음을 수긍해야했다. 큰마음을 먹고 커다란 쇼핑백이 가득 찰 만큼 옷을 빼내어도 옷장의 빈자리는 흔적도 없었고, 있을 것 같던 아쉬움도 생기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여행 가방에 차곡차곡 옷을 넣은 것은 제대로 이별하고 싶은 나만의 의식일지도 모르겠다. 낡고 묵직한 가죽가방에는 두툼한 손잡이와 빛바랜 금속 고리가 달려있다. 옛날 흑백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올드패션의 멋이 있다. 장식으로 거실에 놓았는데, 바라볼 때마다 아버지가 그립다. 단단하고 각이 진 가방을 양옆으로 벌리면, 평평한 바닥과 너른 품이 옷을 구지지 않으려는 배려를 전한다. 가방바닥에는 셔츠나 구두 등을 넣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 따로 있는데, 지금 봐도 감탄스러운 디자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신식의 바퀴달린 초경량 가방이 이런 멋과 배려를 밀쳐내기라도 한 것 같아 이따금 안타깝다.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듯, 그런 것들이 그립다.

가방이 모두의 시선을 끌면서 패션쇼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지만, 집주인이 준비한 아름다운 상차림에 감탄하고 감사하는 것이 먼저다. 충분히 음식을 맛보고, 여유롭게 대화를 나누고 나서, 패션쇼의 시작을 알렸다. 부인들을 방으로 불러 옷을 펼치며, 취향과 사이즈가 맞는 사람은 가져가라고 했다. 이 옷 저 옷을 입어보고, 그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행위는 여인들만의 들뜸이고 즐거움이다. 사용하지 않은 물건을 다시 쓰고, 함께 나눈다는 의미 같은 건 말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우려했던 것들이 죄다 소용이 없어져서 기뻤다. 느닷없는 패션쇼 때문에 집주인의 정성이 희석될까봐, 새 옷이 아닌 입던 옷이 누군가에게 불편을 줄까봐, 취향과 사이즈라는 이유로 많이 가져가는 사람과 하나도 못 가져가는 사람이 있을까봐, 그리고 옷이 많이 남을까봐, 여러 번 망설였었다. 웃으면서 흔쾌히 골고루 몽땅 다 나눠가지게 되어 참 다행스러웠다. 모델이 런웨이를 걷는 것처럼, 여인들은 수줍게 거실을 한 바퀴 돌았고, 남편들은 박수를 보내며 사진을 찍었다.

불쑥 떠오른 생각이 어쩌면 불쑥 떠오른 게 아닐지도 모른다. 20여 년 전, 영국에서 채리티샵(자선상점)을 처음 보았다. 집에서 쓰지 않는 물건을 기증하는 것과 그토록 낡고 자질구레한 물건을 판매하는 것에 놀랐다. 정책적으로 시내중심가에 상점을 두고, 각각의 가게는 심장병 환자, 암 연구, 파킨슨 병 환자 등을 지원한다. 노인들이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기증과 기부가 생활 속에 있다. 나는 영국에 갈 때마다 단골가게마냥 그곳에 갔는데, 한국에도 영국의 옥스팜(Oxfam)을 모델로 한 ‘아름다운 가게’가 생겨 뿌듯하다. 그런 관심은 많은 주부들과 함께 수개월에 걸쳐 준비해서 기증 받은 물건을 판매하는 One Day Charity Shop(일일 자선가게)을 6년 동안 한 것으로 이어졌다. 예전에 서로 옷을 물려주거나 친구들과 입던 옷을 교환하고 선물하는 글을 읽은 것도 한 몫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집에서 패션쇼를 했다. 과감함이 더 요긴한 나이가 된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집에서 했다.

이진숙 전 ‘클럽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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