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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당파싸움의 희생양? 정조 의중 담긴 실록에 속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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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당파싸움의 희생양? 정조 의중 담긴 실록에 속지 말라

입력
2018.11.12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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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설 교수, 한중록 연구 통해 15~16일 학술대회서 지적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적으로 비교할 대상이 드문 자랑스러운 기록문화 유산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적으로 비교할 대상이 드문 자랑스러운 기록문화 유산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조선왕조실록’은 자랑스러운 우리 기록 문화를 보여주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이다. ‘단일 왕조 470여년에 이르는 기록’이라는 점에서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 자랑스러움이 실록의 무오류성을 보장하진 않는다. 권력의 기록, 특히 왕조시대 절대권력의 기록은 두세 번 되물어야 한다.

15~16일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되는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의 ‘임오화변 관련 자료로 본 궁중사 서술의 제 양상’은 이 문제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임오화변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말한다.

정 교수는 ‘한중록’ 연구를 통해 사도세자 죽음이 당파 싸움 때문이었다는 주장을 잠재웠다.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기 전전날 밤 칼을 찬 채 하수구를 통해 영조가 머물던 경희궁까지 다녀오면서 영조를 ‘아무렇게나 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임금을 죽이려 한 것이다. 왕조시대, 살려둘 수 없는 죄다.

이 연구를 2012년 ‘권력과 인간’이란 책으로도 냈으나 여전히 반론에 시달린다. 사도세자가 당파 싸움의 희생자여야, 사도세자를 되살리려 한 정조의 노력이 성군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을 한낱 궁중의 편협한 늙은 여인이 쓴 회고록 정도로 깎아내린다. 정 교수는 그러나 그보다 더 의심해봐야 할 것은 ‘정조’라는 당대 절대 권력자의 의중이 담긴 공식기록이라 반박한다.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선 ‘영조실록’. 사도세자의 악행을 서술하지만 뒤주 사건이 일어난 결정적 계기에 대해선 설명이 없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죄상을 준엄히 꾸짖은 ‘폐세자반교’도 누락됐다. 세자 박탈을 선언하는 명분이 담긴 문건인데 그렇다. 실록은 주요 문건을 전문으로 싣는다.

영조실록 편찬 과정부터 그렇다. 정조는 사도세자 말년 부분을 쓸 노론 쪽 집필자를 지정하는 등 영조실록 편찬 과정에 노골적으로 개입한다. 동시에 ‘경종실록’ 개수작업도 허락한다. 경종실록 개수작업이 당시 노론의 숙원 사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묘한 냄새가 난다.

실록보다 훨씬 더 상세하다는 ‘승정원일기’도 이상하다. 사도세자 관련 부분은 어김없이 삭제됐다. 1776년 동궁이던 정조는, 죽기 직전의 영조에게 허락을 얻어 승정원일기에 손댔다. 승정원일기엔 ‘병신인전교세초(丙申因傳敎洗草ㆍ병신년 임금의 전교로 지웠다)’란 문구가 남아 있다. 승정원일기에도 ‘폐세자반교’는 없다.

마지막으로 ‘현륭원지’. 정조가 사도세자 묘를 수원으로 옮기면서 쓴 글이다. 이건 의도가 쉽게 읽힌다. 광증 이전 사도세자의 훌륭함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포인트는 다른 곳에 있다. 이장하면서 영조가 사도세자 원래 무덤에 넣어뒀던 ‘사도세자 묘지명’을 슬쩍 버렸다. 묘지명엔 사도세자의 잘못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비뚤어진 부자관계가 있었다 해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과 죽이는 것은 분명 다르다. 사도세자를 피해자로 간주하는 건, 정조를 성군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비뚤어진 부자관계가 있었다 해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과 죽이는 것은 분명 다르다. 사도세자를 피해자로 간주하는 건, 정조를 성군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반면 한중록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다. 혜경궁이 한중록을 쓸 무렵 혜경궁 집안에선 왕실과 친정을 오간 편지들을 대대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 있었다. 1899년 왕실에서 사도세자 추존 문제를 논의할 때 한중록이 핵심자료로 언급되기도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한중록은 정조라는 절대 권력자의 의도에 맞서기 위해 “최고 지위에 있었던 여인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만든 비사(秘史)”에 가깝다. 공식 기록일수록 권력에 젖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록이란 이름에 짓눌려서는 안 되는 이유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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