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제훈 작가는 ‘늦깎이 문청’이었다. 연세대 경영학과 92학번인 그는 군대 제대 후 문학을 마음에 품었다.졸업하고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다시 입학했다. 2007년 데뷔해 소설집 한 권과 장편소설 세 편을 냈다. 문학동네 제공

최제훈(45)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현혹되고 또 현혹되는 경험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그의 소설에 딱 맞다. 그는 소설 문법으로 유희한다. 실제와 허구를 바꾸고, 소설 속 인물과 작가와 독자의 자리를 뒤섞고, 장르와 장르를 연결한다.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는 단언에 반대하고, 소설의 시대가 끝났다는 체념에 저항한다. 2007년 서른 넷에 데뷔하고도 ‘문단의 젊은 박동’으로 불린 건 그런 패기 때문이었다. 2011년 첫 장편소설 ‘일곱 개의 고양이 눈’으로 한국일보문학상을 받았다.

세 번째 장편 ‘천사의 사슬’에서 최 작가는 여전하다. “그러니까 잘 읽어보고 판단해.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서부터 논픽션인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대놓고 경고한다. 추리소설의 몸피를 입은 소설의 모든 문장, 모든 인물, 모든 소품이 최 작가가 치밀하게 펼쳐 놓은 미끼이자 단서다. “본질적인 것보다 부차적인 것을 믿네요.” 주인공인 혼혈 소년 마롤리가 두 번이나 주의를 주지만, 갈팡질팡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야기는 경기 안산의 괴이한 화재 현장에서 시작한다. 폐장한 낚시터에서 불타 죽은 시체가 발견된다. 인천의 성인용품숍, 강원 속초의 술집에서도 비슷한 시체가 나온다. “방화 연쇄살인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케이스”란다. 희생자 셋의 공통점이라곤 “언제 자살해도 이상할 게 없는 쓰레기들”이라는 것뿐이다. 유력한 용의자는 희생자들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던 마롤리다. 마롤리는 타밀어로 메아리라는 뜻. 한국 남성과 스리랑카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당돌한 아이다.

마롤리는 경찰서 취조실에서 형사 이석에게 이야기를 술술 풀어 놓는다. 이주노동자인 엄마는 4년 전 화마에 희생됐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아담이라는 외국인과 동행이 됐다. 기묘한 행색의 아담은 수천 년을 산 연금술사이자 신의 대리인. 그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안산, 인천, 속초의 희생자들을 부활의 의식으로 소각했다고 마롤리는 주장한다. 왜 ‘불로써’였을까. “불은 변화의 욕망을, 시간을 앞당기고자 하는 욕망을, 모든 생명을 그 종말, 그 피안으로 나르고자 하는 욕망을 암시한다. (…) 연금술은 결국 불의 꿈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천사의 사슬
최제훈 지음
문학동네 발행∙344쪽∙1만3,500원

최 작가가 미스터리 판타지로 소설을 맺을 리 없다. 이석은 끝까지 마롤리를 의심한다. 엄마가 실은 마롤리의 첫 번째 제물이 아니었을까. 이석은 마롤리의 여정의 출발인 아버지로 돌아간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집어삼키는 반전. 그리고 다시 반전. 아담의 라이터에 새겨진 사소한 무늬까지도 복선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 소설의 첫 장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것이다.

약간의 힌트. 소설은 분노의 이야기다. 불은 분노였다.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는 성경 구절과 “악마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요. 부싯돌이 부딪쳐 불꽃이 일 듯 생겨나는 거라고”라는 마롤리의 음성 사이에 진실로 보이는 어떤 것이 있다.

최 작가가 반전으로 놀래키는 것만으로 만족할 리도 없다. 그는 소설을 겹겹의 이야기로 쌌다. 한가운데엔 마롤리가 있다. 바로 바깥엔 마롤리 이야기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 최 작가와 동일 인물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마롤리, 이석을 비롯한 소설 속 인물들과 소설 밖의 작가가 번갈아 화자로 나서 이야기를 뒤튼다. 마롤리가 소설 밖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나는 살인마가 아니야!” 작가가 맞받는다. “미안하지만 그건 네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란다. (…) 너한테 본모습 같은 건 없어.” 소설 밖엔 작가의 세계가 있다. 작가의 집으로 물건이 잘못 배송된다. 물건 주인을 만나러 갔더니, 그가 소설 속 마롤리를 안단다. “어디까지가 풍경이고 어디까지가 캔버스의 그림인지” 헷갈린다.

최 작가는 마롤리의 이야기가 ‘진짜처럼’ 보이게 하는 것엔 관심이 없다. “나로선 소설이란 장르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 삶에 굳이 가짜 이야기가 필요한 건지.” 이석의 말이 최 작가의 말일까. “하긴 그런 얘길 누가 믿겠어요. 거짓말이거나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어느 쪽이 더 나쁠까요?” 최 작가가 소설 무용론자여서는 아니다. “문학은 써 먹을 데가 없어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한 것이다. (…) 문학은 무용하므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억압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작고한 문학비평가 김현의 이 말을 최 작가는 품고 산다고 했다(2011년 한국일보 인터뷰). 최 작가에게 소설은 그런 거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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