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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 칼럼] ‘그 놈의 시장’이 뭐길래

입력
2018.11.08 18: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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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소득주도성장 계속” 시정연설

“시장이 불평등 주범” 장하성 주장 수용

시장과 반목하는 정책, 지속가능성 없어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새해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새해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으로 시작된 경제학 250년 역사는 흔히 시장과 정부가 끊임없이 대립하고 충돌하며 균형점을 찾아온 역사로 압축된다. 시장과 정부 가운데 어느 쪽이 한정된 자원을 투입해 만든 생산물을 사회 각 계층에 고루 나누는 일을 잘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시장은 경쟁과 효율을, 정부는 규제와 공정을 상징한다. 우리가 배우고 아는 일련의 경제학설과 이론도 따지고 보면 사회적 생산과 분배 메커니즘에 남다른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시장과 정부의 역할 및 한계를 연구한 결과물일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이 찾아낸 명쾌한 답은 없다. 그나마 있다면 ‘공짜 점심은 없다’는 명제 정도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게 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새해 예산안 시정연설이다. “경제 불평등을 키우는 과거 방식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며 ‘함께 잘 사는 포용사회’를 국정 화두로 주창한 대통령은 소득주도성장ㆍ혁신성장ㆍ공정성장 등 사람 중심 경제의 3대 정책기조를 계속 이어 가겠다고 못 박았다. 시장을 중시한 성장 방식 덕에 우리 경제는 외형적으로 세계가 찬탄할 만큼 놀라운 성과를 거뒀지만, 이 과정에서 불평등과 불공정이 최악으로 심화돼 사회 통합을 해치고 지속가능한 발전마저 가로막고 있다는 진단이 출발점이다. 처방은 ‘함께 잘 살고, 지속가능한 사회’로 가는 3대 기조이고 국민에게 인내할 것은 ‘시간’이다.

“저성장과 고용 없는 성장, 양극화와 소득불평등, 저출산ㆍ고령화, 산업구조의 변화 같은 구조적 문제는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과제다. 경제체질과 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성과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국민 단 한 명도 차별받지 않는 나라’가 가야할 목표라는 문 대통령의 호소는 강렬하지만 그다지 감동이 없다. 왜 그럴까. 개념조차 오락가락하는 소득주도성장을 고집하며 열린 논의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시장과 정부의 유용성과 폐해를 연구한 수많은 경제학자가 지금껏 결론내지 못한 사안을 ‘함께 잘 살자’는 선의로 너무 쉽게 덮어 버린 까닭이다.

우리 경제의 현실과 미래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리고 도처에서 아우성인데 대통령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왔을까. 현 상황을 돈으로 달랠 수 있는 성장통으로 보는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근원지였다. 그는 최근 학계와 시장에서 제기하는 위기론에 대해 “근거 없다”고 일축하고 “시장에서 경제 모순이 만들어졌는데 경제를 시장에만 맡기라고 하는 일부 주장은 한국경제를 더 큰 모순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 강변했다. ‘슈퍼 예산’ 논란에 대해서도 “경제가 어렵다면서 국민이 낸 세금을 국민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모순”이라며 “양극화의 고통을 가져온 과거 방식, 목적을 상실한 성장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6일 열린 국회 운영위의 청와대 국정감사에 출석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이 질의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다. 그 뒤에서 김수현(왼쪽) 사회수석과 윤종원 경제수석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오대근기자
6일 열린 국회 운영위의 청와대 국정감사에 출석한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오른쪽)이 질의를 들으며 생각에 잠겨있다. 그 뒤에서 김수현(왼쪽) 사회수석과 윤종원 경제수석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오대근기자

문 대통령의 시정연설과 장 실장의 발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식은 물론 표현까지 엇비슷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장 실장이 연설문 작성에 깊이 개입했고 문 대통령이 그 취지를 그대로 수용했다는 뜻이다. 문 대통령이 경제팀 교체를 검토하면서도 시장을 괴물로만 여기는 기존 정책기조를 재천명한 이유는 뭘까. 시장에서 모든 모순이 만들어졌다는 장 실장의 단정은 경박하고 “많이 거둔 세금 되돌려 주는 게 왜 문제냐”는 슈퍼 예산 옹호 논리는 설익은 선동의 냄새마저 풍기는데도 말이다. 최저임금부터 탈원전까지, 엉망진창으로 어질러놓은 정책을 되돌리는데 따른 혼란과 부작용이 더 크다는 판단과 ‘뱉은 말은 지킨다’는 특유의 강박관념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시장의 힘과 지혜를 외면하고 경멸하는 태도로는 결코 포용 사회로 갈 수 없다. 강준만도 알고 심상정도 알기에 “(부동산에 밝은) 사적 삶처럼 공적 영역에서도 시장을 연구하라”고 진보 세력에 당부하고 “시장 안에서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하는 거다. 시장은 그 자체로 선이나 악이 아니다. 다루기 어렵다고 배척할수록 재앙적 얼굴로 다가온다. 시장에 대한 대부분의 오해는 무지와 열등감에서 온 것이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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