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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은 딱히 없지만…” 뽑으라니 뽑는 정부 단기 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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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은 딱히 없지만…” 뽑으라니 뽑는 정부 단기 일자리

입력
2018.11.09 04:40
수정
2018.11.09 09:16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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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용쇼크 응급처방’ 일선기관 압박해 질 낮은 일자리 급조 

 이틀간 ‘나라일터’ 채용공고 145건 중 60건이 교도소ㆍ구치소 등 

서울 시내 한 대학교의 취업게시판에서 학생이 채용정보를 열람하고 있다. 한국일보
서울 시내 한 대학교의 취업게시판에서 학생이 채용정보를 열람하고 있다. 한국일보

“솔직히 할 일은 딱히 없어요. 그래도 일단 와보세요.”

정부가 고용쇼크 해결을 위한 ‘응급처방’으로 연내 공공부문의 맞춤형 일자리 5만9,000개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지 보름이 지난 8일. 기간제(단기) 근로자 15명을 뽑는다는 채용 공고를 낸 경기권 교도소에 전화로 ‘어떤 일을 맡게 되냐’고 묻자 이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전화를 받은 교도소 관계자는 “교도소에서 급하게 사람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겠냐”면서 “정부 시책으로 갑자기 채용하라고 법무부에서 인원까지 미리 정해서 지시가 내려온 터라 일단은 뽑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500명에 달하는 외국인 불법고용방지 계도요원을 채용하기로 한 출입국외국인사무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출입국외국인사무소 관계자는 “내근이 아니라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점 외에는 정확한 계획이 없다”고 전했다.

8일 정부의 맞춤형 일자리 채용 공고가 올라와 있는 인사혁신처 나라일터. 해당 사이트 캡처.
8일 정부의 맞춤형 일자리 채용 공고가 올라와 있는 인사혁신처 나라일터. 해당 사이트 캡처.

한국일보가 이날 공직 채용정보를 제공하는 인사혁신처 ‘나라일터’ 홈페이지에 5, 6일 이틀 동안 올라온 채용공고(145건)를 분석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71건이 정부의 맞춤형 단기 일자리로 나타났다. 특히 구치소와 교도소, 출입국외국인사무소 등의 공고가 이 중 60건을 차지했는데, 법무부가 최근 공문을 보내 단기 일자리ㆍ인턴 채용을 주문하자 일제히 공고를 낸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맞춤형 일자리가 △청년실업 완화 △공공서비스 제고 △취약계층 지원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정작 일선기관에서는 갑작스런 ‘일자리 짜내기’에 분주한 기색이 역력했다. 가뜩이나 단기 일자리를 선호하지 않는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에서 정부 방침에 맞춰 급조하다 보니 청소나 서류복사 같은 단순 노무를 맡거나, 그마저도 담당할 업무조차 제대로 정해지지 않았는데 일단 ‘뽑고 보자’는 식의 채용공고를 쏟아내는 실정이다.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한창 바쁠 때도 아니고 연말이라 올해 사업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수십 명의 인력이 필요한 기관이 있을지 의문”이라며 “한 달짜리 단기 근로자를 쓰겠다고 채용하고 교육시키는 게 직원들 입장에서는 더 큰 일”이라고 털어놨다

정부는 고용 사정이 더 나빠지는 연말의 ‘고용 보릿고개’를 일자리 지원으로 넘겨보겠다는 판단이다. 그러나 연말까지 한시 채용이라 계약기간이 짧게는 2주부터 길어야 2개월 정도인 초단기 아르바이트에 불과한 만큼 애초에 ‘질 나쁜 일자리’를 피하는 건 어려웠다는 지적이다. 특히 정부가 만들겠다는 맞춤형 일자리를 뜯어보면 빈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소등하는 국립대 에너지 절약 도우미(1,000명)나 산불ㆍ전통시장 화재 감시원(1,500명), 라돈 측정 서비스(1,000명)처럼 시급성이 떨어지거나 목적이 불분명한 업무도 적지 않다. 광주지방검찰청 관계자는 “원래 일을 배우는 기간만 한 달 이상 걸린다”며 “기간이 짧기 때문에 책임이 필요한 일은 맡기지 않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당장 공고를 내고 1~2주 안에 원서접수 및 면접, 최종 합격자 발표까지 매듭지어야 하는 촉박한 일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충청에 있는 교도소 관계자는 “보통 아르바이트를 뽑을 땐 한 두 달 정도의 시간을 두고 채용하는데, 이번엔 기간이 짧아 인원을 다 채울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 정부 부처는 4시간짜리 단기 일자리 공고를 냈다가 내용에 오류가 있어 부랴부랴 공고를 삭제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일자리 대책에 대해 정부 차원의 단기 일자리 창출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그야말로 돈으로 때우는 땜질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 같은 단기 일자리는 노인 일자리에는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청년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못 된다”며 “청년들은 중장기적으로 꾸준히 구인ㆍ구직을 해야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연령대인데 경력도 못 되는 사무보조나 화재 감시라는 단기 일자리로 오히려 ‘기회비용’을 지불하게 된다”고 꼬집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교수는 "차라리 그 예산으로 꼭 필요한 공공서비스 일자리에 사람을 제대로 뽑아 장기적으로 일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반면 정부는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계속되는 고용부진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단기 처방’이라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최근 본보 인터뷰에서 “요즘 일자리 문제를 겪는 분들은 주로 임시ㆍ일용직 영세 자영업자들이라 맞춤형 일자리 대책이 불가피한 면이 있다”고 밝혔다. 고형권 기획재정부 1차관도 지난달 23일 일자리 대책 사전 브리핑에서 "흐름을 반전시켜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평상시라면 꺼려하는 수단도 동원했다"고 설명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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