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퀸(Queen)의 리드 싱어 프레디 머큐리는 외국 순회 공연을 마치고 돌아 와 사랑하는 이에게 소회를 풀어놓으며 말한다. 라이브 무대를 바라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던 관객들은 “그들 자신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밴드 초창기, 앨범 제작자가 당신 밴드만의 색깔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우리는 부적응자를 위해 노래하는 부적응자다. 그들의 밴드다”라고 지향했던 바가 한 걸음 더 원대하게 이루어지는 순간을 그렇게 되새긴다.

예술의 가장 소박한(!) 역할은 노래를 만들지는 못하지만 저마다 가슴에 노래를 안고 사는 이에게 노래라는 언어를 안겨주는데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 무슨 노래가 있을지 궁리하며 노래를 만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래도록 좋은 노래는 우선 내 마음을 울리고 나와야 다른 이의 마음과 만나 파동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프레디 머큐리가 훗날 얼마나 유명한 곡이 될 지도 모르는 채, ‘러브 오프 마이 라이프’의 악상을 흥얼거리며 “너무 좋다”고 혼자 연신 감탄했듯이.

그런데 동시는, 독자가 어린이라는 이유로 즉 어른 작가와 나이 차이도 많고 아주 다른 존재라는 이유로, 작가의 노래를 먼저 들여다보기보다 어린이 마음 속 노래를 더 궁금해 했다. 반면 ‘레고 나라의 여왕’은 자신과 솔직하고 용감하게 대면하며 길어 올린 작가의 노래로 어린이 독자와 만날 길을 찾아 나선다. 슬프고 외롭고 무엇보다 불안한 이 노래는 작가의 노래이기에 전에 없던 노래다. 바로 그렇기에 이 노래는 지금껏 동시가 한 번도 제대로 호명하지 못한 새로운 어린이 독자의 노래가 된다. 인형이, 내가 아닌 동시에 곧 나인, 분신의 성격을 지니듯.

문예지에 김개미의 새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숨죽여 작품을 읽었다. 첫 시집 ‘어이없는 놈’과는 다른 작품을 하나 둘 발견하고 나서부터다. 기뻐하고, 놀라워하고, 감사하며 아직 채 시집으로 묶이지도 않은 작품에 대한 평론을 썼고, 한 편 한 편이 모여 만들어 낼 김개미 동시의 새로운 지도를 그려보곤 했다. 이제 확인해보니 지도의 도법은 예상대로지만 지도에 그려진 영토는 더 멀리 뻗쳐 있고, 산맥과 강은 더 깊고 푸르다.

자기 자신 안에서 만난 어린이의 목소리로 드디어 시인은 새로운 노래를 부른다. ‘발랄한 상상, 세련된 언어’가 김개미 동시의 핵심이 아니라고, 평론이라는 쓸쓸한 글로 나 혼자 목청 높여 말할 필요가 이젠 없겠다. 퀸은 가장 높은 이름으로, 개미는 가장 낮은 이름으로 모두에게 문을 활짝 열어두는 왕국을 만들었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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