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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준호의 역사구락부] 한일 격차 600년, (6) 말뿐인 민생 우선

입력
2018.11.08 18:30
수정
2018.11.29 10:29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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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세종대에 확인된 양국 격차의 생성ㆍ확대 배경의 하나로 말뿐인 민생 우선을 다룬다. 조선의 지배층 인사들은 입을 열고 붓을 잡았다 하면 백성을 위하고 살리자고 했다. 실록에는 ‘~하여 민생을 안정시킨다’(以安民生)와 유사한 표현이 많다. 안(安)대신 편(便), 활(活), 구(救), 후(厚), 유(裕), 휼(恤), 소(蘇), 위(慰) 등이 들어가는데, 크게 보면 ‘백성의 눈높이에 맞는 정치로 백성을 편하게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백성보다 양반 등 기득권층과 그 주변을 돕고 편하게 하는 사례가 더 많았다. 신하들의 입끝과 붓끝에서 나온 제안 중 상당수는 사정이 여의치 않다거나 현실의 벽이 높다면서 흐지부지된다. 의욕을 불태우는 권력자와 사대부일수록 깊은 좌절을 맛보는 실격의 역사기였다.

“...기강면에서 사정을 따르고 공도를 등지는 것이... 호령이 행해지지 않는 것이... 백관이 직무를 태만히 하는 것이... 민생에선 집에 항산이 없는 것이... 안주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궤도를 벗어나 사악한 짓을 하는 것이 예전 그대로...”

“신하들의 정책 건의는 말단적인 것을 바로 잡으려 하고 근본적인 것을 헤아리지 않아 듣기에 아름답지만 행해보면 내용 없어... 군자같은 신하가 중용되어 바르게 논의해도 민생과 관계 없어... 그 사람 덕분에 혜택이 백성에까지 미치게 되었다는 말 들어본 일 없어...”

우부승지 이이가 1574년 1월 1일 올린 만언소의 일부다. 요체는 조정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이미 세운 법제가 지켜지지 않고 공직자들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부패가 만연해 조정과 일선 지방까지가 제멋대로라는 것이다. 유사한 내용이 1811년 3월 30일자 순조대 각도 폐단 서술, 1862년 6월 9일자 철종대 안핵사 이정현의 익산 지역 환상 폐단 보고에도 나온다. 문란해진 기강을 바로잡을 감독ㆍ감사 체제가 장기간 제 기능을 못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개혁은 다수가 ‘해보았다’는 수준이고 뚝심있게 밀어부쳐 효과를 낸 개혁은 몇 없다. 특산물 관련 공납에 따른 불공평과 부조리를 줄이려는 대동법, 군역 부담의 불공평 등 폐해에 대처하는 균역법, 결제 편익과 거래비용 축소를 위한 상평통보 사용 확대가 그나마 인내심 있게 추진되지만 목표에 이르지 못한다. 개혁을 통한 민생의 개선이 더디고 효과가 작다 보니 서민문화의 창달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일본에선 막부 장군과 지방 번주들이 부국의 기치 아래 경쟁적으로 경작지를 늘리고 상공업을 장려한다. 에도시대 개혁은 개혁가 교체에 따른 목표 상충 등의 시행착오가 없지 않지만 큰 방향에서 상공업의 발전과 근면 정착으로 민생의 안정과 개선에 기여한다. 무사 외 상인ㆍ장인ㆍ호농 등이 혼거하는 성하마을인 에도ㆍ오사카ㆍ교토는 한성보다 크고 경제도 활성화되었다.

농민은 생산량의 30% 정도를 영주에게 세금인 넨구(年貢)로 내며 군역 부담은 없다. 실효세율이 명목세율 40%보다 낮은 것은 양전이 오래되어 비과세 전답이 있고 면화, 담배 등 상품작물 재배가 늘었기 때문이다. 18세기초 지식인 겸 권력자인 아라이 하쿠세키는 실효세율을 28%로 추정한 바 있다. 촌 단위로 넨구 총액이 할당되면 촌장 격인 나누시나 쇼야가 검지장에 실려 있는 소유자별로 나눈다. 이러한 촌청제 방식과 높은 생산성, 나누시의 배려 등으로 소작농인 영세 농민의 삶은 조선보다 다소 나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농민의 주식은 조와 피 등 잡곡류가 중심이었고 쌀밥을 편식한 무사ㆍ지주ㆍ조닌 층 일부는 비타민 B1 결핍으로 각기병에 걸린다.

평화기가 길어지면서 서민 문화가 발달한다. 조닌층의 수요에 촉발되어 가부키, 인형극인 닌교조루리, 1인 만담 성격의 라쿠고, 샤레본ㆍ닌조본 등 풍속 소설, 판화인 우키요에, 전통공예 분야에서 다양한 인재와 작품이 나온다. 소설가ㆍ극작가로 생계를 잇는 이들이 나오는 배경에는 초등교육의 보편화에 따른 높은 식자율과 독서 열기가 있다. 19세기 중반 에도의 취학률은 7할 이상으로 영국, 프랑스의 도시 아동 취학률 3할 이하보다 높았다.

정리하면 근세에서 근대로 이행할 무렵 조선에선 많은 노비 인구, 소작농 증가에 따른 빈부 격차 확대와 약한 민생 개혁으로 서민 문화가 싹틀 기반이 형성되지 못한다. 일본에선 소작농 증가로 빈부 격차가 커지지만 노비가 매우 적고 경제적 여유를 지닌 조닌층이 전 인구의 10% 정도를 점해 서민 문화가 꽃을 피운다. 개화기에 높은 식자율, 노ㆍ가부키 등의 전통극, 소설, 그림, 자기 등의 전통 문화와 공예에 대한 서구권의 평가로 일본 역사의 품격이 높아진 사실은 그렇지 못했던 조선과 대조된다.

지난 50년의 성장으로 민생고에서 벗어났지만 우리에게 민생은 여전히 우선 과제의 하나다. 달라진 점은 방탄소년단(BTS)을 위시한 한류 등 대중문화의 창달이다. 물질적 풍요 아래 정치 민주화로 사고와 표현에 대한 유무형의 굴레가 벗겨지면서 민족의 끼와 잠재력이 발휘되고 있다.

배준호 한신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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