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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그루밍 성폭력

입력
2018.11.07 16:04
수정
2018.11.07 17:3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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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시작되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수행비서 성폭행 항소심 재판의 쟁점 중 하나는 ‘그루밍(groomingㆍ길들이기)’이다. 가해자가 호감과 신뢰로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적 가해를 하는 범죄인 그루밍 인정 여부가 관심이다. 1심에서 비서 김지은씨의 심리상태를 관찰한 전문가들이 “그루밍에 빠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 의견을 재판부가 배척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때문이다. 그루밍의 대상이 주로 아동ㆍ청소년이라는 게 이유였으나 성인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고 성폭력 전문가들은 말한다. 연령이나 공간이 아닌 권력 불균형이 본질인 그루밍에 대한 사법당국의 이해도가 낮다는 것이다.

▦ 그루밍에 대한 몰이해와 편향적 태도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가 2013년 재판에 넘겨진 40대 연예기획사 대표 A씨 사건이다.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해 여중생과 성관계를 맺고 임신까지 하게 한 혐의로 기소돼 1, 2심에서 각각 징역 12년과 9년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이 여중생이 A씨에게 “사랑한다”고 보낸 편지를 근거로 무죄 취지로 2심으로 돌려보냈다. 여중생은 “두려움과 강요 때문에 편지를 썼다”고 항변했으나 파기환송심은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의 이례적 재상고로 다시 대법원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중학생이 부모 또래이자 우연히 안 남성과 며칠 만에 이성으로 좋아해 관계를 맺었다고 수긍할 수 있을까.

▦ 최근 알려진 교회 그루밍 성폭력 가해 목사를 강력히 처벌해 달라는 국민청원이 8,000명을 넘었다. 인천 모 교회 담임목사의 아들 김모 목사가 전도사 시절부터 지난 10년간 중고등부ㆍ청년부 신도를 대상으로 그루밍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건데 피해자가 최소 26명에 이른다고 한다. 6일 기자회견에서 피해자들은 “스승과 제자를 뛰어넘는 사이니 괜찮다며 저희를 길들였고 사랑한다거나 결혼하자고 했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을 더 힘들게 한 것은 “너희도 같이 사랑하지 않았느냐는 어른들의 말”이라고 했다.

▦ 범죄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그루밍은 취약성 파악해 피해자 고르기, 따스함 드러내기, 욕구 충족시키기, 고립시키기, 성적 관계 만들기, 회유ㆍ비난해 통제하기 등 6단계로 진행된다. 그루밍의 작동 과정을 모르면 피해자의 심리적인 특성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성폭력 사건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늘 ‘성인지 감수성’의 결여에 있다.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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