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여론전의 막전막후
'벽위편' 가운데 진산 사건의 추이와 경과를 서술한 대목. 진산 사건을 고리로 한 정치적 공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소문

진산 사건의 소문이 커지자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은 서울로 편지를 보내 채제공에게 이 일을 알리고, 처리 방안에 대한 지침을 내려 줄 것을 청했다. 채제공에게서는 한 달 가깝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 와중에 소문이 겉잡을 수 없이 퍼져 홍낙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홍낙안은 1791년 9월 27일,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편지를 썼다. 신사원은 같은 남인으로, 홍낙안과 신사원은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신사원은 다산이 부친에 대한 기억의 편린을 모아 적은 ‘선인유사(先人遺事)’에도 한차례 등장하는 바, 다산의 부친 정재원과 가깝게 지낸 벗이기도 했다. 신사원은 이 일을 공론화할 경우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 불 보듯 뻔했고, 윤지충은 호남 명문가의 후예인데다 정재원의 처조카여서 접근이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7품의 임시관직인 가주서(假注書)를 지냈다지만 당시 아무 직책이 없던 홍낙안이 훨씬 선배인 신사원에게 편지를 써서, 왜 진산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하지 않느냐고 추궁을 했다. 그 내용은 하루라도 빨리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한 윤지충과 권상연을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이렇듯 미적거리는 것은 한패라 봐주려는 것이 아니냐는 행간이 있었다. 채제공의 소식을 마냥 기다리고 있던 신사원은 느닷없는 편지에 크게 놀랐다.

진산 사건을 둘러싼 왕복 서신과 통문 및 상소문 등은 이기경이 묶은 ‘벽위편’과 ‘동린록(東麟錄)’ 등에 수록되어 전한다. ‘벽위편’은 양수리 이기경 고가에서 1959년 홍이섭 박사에 의해 발견된 이른바 ‘양수본(兩水本) 벽위편’과 후손인 이만채가 간추려서 엮어 펴낸 ‘절략본(節略本) 벽위편’ 등 2종이 남아있다. 이중 ‘양수본’에만 이들 글이 작성된 정확한 날짜가 밝혀져 있다. 이후 서신 왕복과 관련 글의 작성 일자는 ‘양수본’에 따랐다.

◇서슬 퍼런 편지

홍낙안은 이틀 뒤인 9월 29일, 좌의정 채제공에게도 한 통의 장서(長書)를 올렸다. 장서는 일반적으로 재상에게 올리는 글을 이르는 다른 표현이다. 홍낙안이 보낸 장서는 길이도 길었지만, 그 형식이 일종의 공개질의서와 같았다. 장서의 서두에서 홍낙안은 자신이 두 차례나 채제공과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해 억울해서 이 글을 올린다고 썼다. 글은 표면적으로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겨냥했지만, 이것은 문제를 신서파(信西派) 전체로 확대하기 위한 도화선에 불과했다.

홍낙안은 장서의 서두부터 “합하의 문에 출입하는 자들 중에 한 사람도 바른 말과 정론으로 깊이 우려하고 길게 염려하여 합하를 보필하고 받들어 보좌하는 다스림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며 대놓고 도발했다.

저격 대상도 윤지충과 권상연 보다, 서울의 신서파(信西派)임을 분명히 했다. “예전에는 나라의 금지 조처를 두려워하여 어두운 방에서 모이던 자들이 지금은 백주 대낮에 혼자 다니며 공공연히 멋대로 전파합니다. 예전에 파리 머리만한 작은 글씨로 써서 열 번씩 싸서 책 상자에 숨겨두던 자들이 지금은 함부로 간행하고 인쇄하여 서울 밖으로 반포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의 교주가 반드시 훗날에는 역적이 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서학을 믿는 자들을 사납고 흉포하며 불만이 가득한 무리란 뜻의 ‘걸힐불령지도(桀黠不逞之徒)’로 지목하는가 하면, 살기를 싫어하고 죽기를 즐거워하는 ‘오생락사지도(惡生樂死之徒)’ 또는 윤리와 상도를 어지럽히는 ‘멸륜난상지배(蔑倫亂常之輩)’라고도 했다.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을 어떤 죄목으로 처벌하느냐가 앞으로 국가가 서학에 대해 취할 방침을 가늠할 시금석이 될 것이니, 이 변고에 대한 국가의 대응을 예의주시하겠노란 뜻으로 긴 글을 맺었다.

같은 날 성균관에서는 진사 성영우(成永愚) 등 9명이 통문을 돌려, 조문을 온 사람이 윤지충이 곡 하지 않는 것을 의아해 하자 “천당에 올라가셨으니 축하해야지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는 등의 전언을 적고, 10월 4일 섬정동(蟾井洞) 진사 이후(李㷞)의 집에서 모여 이 일을 성토하자고 했다. 여기에 10월 1일, 진사 최소(崔炤) 등이 다시 통문을 돌렸고, 같은 날 홍낙안도 보조를 맞춰 다시 여러 유생들에게 보내는 통문을 작성했다. 진사 목인규(睦仁圭)도 10명의 연명으로 통문을 돌려 가세했다. 일사불란하고 조직적이고 기민한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화기를 직감한 채제공과 홍낙안의 협박

홍낙안의 장서를 받아 본 채제공은 직책 없는 하급 관원이 일국의 좌의정에게 대놓고 공개적인 서한을 보낸 데 먼저 놀랐고, 그 서슬에 한 번 더 놀랐다. 분란을 일으키고 피를 보려는 재앙의 기미가 바로 읽혔다. 그리고 그 칼끝이 자신을 정조준하고 있음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저 두고 볼 수 없는 도발이었다. 이에 호응하는 성균관 유생들의 연쇄적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당시는 영의정과 우의정 없이 채제공 홀로 국정을 전담하던 독상(獨相) 체재였다.

채제공은 분노해서 임금께 올릴 차자(箚子)를 작성해 사태를 주도한 몇 사람의 죄를 통렬하게 물으려 했다. 이 같은 기미를 안 홍낙안이 겁을 먹고, 밤중에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을 찾아갔다.

“대감께서 우리를 죽이시려는 모양인데, 우리가 어찌 혼자만 죽겠소이까?”

“대체 무슨 말이오?”

“근자에 정약용의 서매(庶妹)가 좌상의 며느리가 되었다지요?”

채제공의 덕을 모두 기록한 글 '상덕총녹'. 딸과 며느리에게 집안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 작성된 글이다. 필사자는 채제공 서자 채홍근의 부인이자 정약용의 서매인 정씨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 혼인은 정적들의 공격 포인트였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채제공의 서자와 정재원의 서녀가 얼마 전 혼인하여 두 집안은 사돈이 된 직후였다. 홍낙안의 이 말은 만약 자신들에게 죄를 주려 하면, 채제공이 정재원과 사돈이 되었기 때문에 서학을 믿는 다산의 무리를 두호(斗護)하고 정재원의 처조카인 윤지충을 지켜주려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공격하겠다는 뜻이었다. 놀란 채홍원이 밤중에 부친을 찾아가 상황을 말해 차자를 올리는 일은 늦춰졌고, 올렸을 때는 당초보다 어조가 훨씬 누그러지고 말았다.

어쨌거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목인규는 오석백(吳錫百)과 이윤하(李潤夏), 이총억(李寵億) 등 신서파 인물 5인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고, 향후 자신들의 모임에 이들을 참여시킬 수 없음을 천명했다. 향후 이들을 처단 대상에 올리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목인규 등은 이튿날 성균관의 서학(西學)에 모여 궐기하여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쟁점화하기로 약속했다.

이때 통문에 이름을 올린 최환(崔煥)과 이후(李㷞)가 평소 친분이 있던 이승훈의 동생 이치훈에게 급박한 상황을 슬쩍 귀띔해주었다. 깜짝 놀란 이치훈이 그 길로 다산을 찾아가 대응책 마련에 돌입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 논의한 끝에 두 가지 방향을 잡았다. 첫째, 채제공을 겁먹게 해서 움직이고, 둘째 청파(靑坡) 도곡(桃谷)의 남인들을 동원해서 이들의 집단행동을 원천 봉쇄하자는 것이었다. ‘눌암기략’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다산과 이치훈의 반격

한편 ‘벽위편’에는 정약용이 밤중에 채홍원을 찾아가, 사돈의 연분을 들며 한편으로 애걸하고 한편으로 협박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채제공을 겁먹게 해서 움직이자는 방안의 구체적 내용이 여기에 나온다. 그 논리는 이러했다. ‘홍낙안이 이 일을 벌인 것은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소문을 들으니 노론의 김종수와 심환지 등과 더불어 비밀리에 모의해서, 겉으로는 척사(斥邪)의 명분을 빌려 안으로는 채제공의 손발을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일 뿐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을 성토해서 겨를 핥다가 쌀알까지 해를 입히려는 수작이니, 대감이 덩달아 나서면 우리들이 모두 다치는 데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겨이고, 채제공의 최측근인 다산을 위시한 신서파의 남인들이 쌀알인데, 그들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대감마저 자리에서 끌어내려 자신들의 새 판을 짜는 것이 최종 목표라는 논리였다.

두 번째, 도곡의 남인들을 동원해 통문에 연명한 남인을 누르기로 한 계획도 밤 사이에 숨가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궐기대회에 동참을 약속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불참했고, 겨우 6,7인만 모인데 그쳤다. 뒤늦게 도착한 채홍원마저 자신은 정승의 아들이니 이 같은 논의에 참여할 수 없다며 자기 이름을 지워버렸다. 밤 사이에 아버지 채제공과 상의한 결과였다. 모였던 몇 사람도 재앙을 일으키려는 화심(禍心)이 있다고 내몰리자 겁을 먹었다. 결국 이들의 성토는 아무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다산과 이치훈은 순발력 있는 신속한 대응으로 자칫 파국으로 치달을 상황을 하루 밤 사이에 극적으로 반전시켰다.

채제공이 자신의 글을 '번암시문고'로 묶자 정조가 시문집에 대한 평을 겸해 직접 글을 지어 내렸다. 채제공은 이를 목판으로 제작했다.

‘벽위편’ 중 ‘신해진산지변(辛亥珍山之變)’ 조의 서두에 다음의 글이 나온다. “사학(邪學)하는 무리들이 스스로 겁을 먹고, 이승훈과 정약용 등이 마침내 상대를 헐뜯을 계획을 냈다. 홍낙안의 장서 중에 총명하고 재주 있는 사람 운운한 말을 들어 일망타진하려는 화심이라고 지목하고, 또 채제공에게 이간질해서 ‘이것은 대신을 쥐고 흔들어 사학하는 사람과 채당(蔡黨)을 공격하려는 것’이라고 했다. 이때 채제공이 평소 믿고 무겁게 여겼던 순암 안정복과 간옹 이헌경은 이미 세상을 떴고, 여와 목만중은 너무 늙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홍낙안과 이기경은 나이가 젊은데다 벼슬이 낮았고, 성영우와 강준흠 또한 모두 젊은 유생이었다. 이 때문에 사학하는 무리들이 두려워하거나 거리끼는 바가 없이 제멋대로 능멸하여 짓밟았다.” 이 글에서 말한 채당은 당시 조정에서 채제공을 옹위하던 다산과 이벽의 아우 이석, 이승훈의 부친 이동욱과 이가환, 이익운 등을 지칭한 것이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홍낙안은 10월 6일에 채홍원에게 다시 장문의 편지를 썼다. 자신이 장서를 올린 이후 감당할 수 없는 비방이 쏟아져 견디기 힘든 정황임을 말하고, 자신의 입장을 하나하나 되풀이해 설명했다. 이어 글을 올린 지 열흘이나 되었는데도 답장 한 줄 받지 못했으니, 이 편지를 채제공에게 전달해 자신이 결코 사심으로 한 일이 아님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전력을 다해 휘두른 칼이 허공만 갈랐다. 채제공의 침묵이 예상 외로 길어지자 홍낙안은 점점 불안해졌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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