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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언어번역기] 생략에 ‘진짜’가 있다

입력
2018.11.0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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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언어의 특징 중 하나는 생략과 반어의 화법이다. 사진은 거울에 비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치언어의 특징 중 하나는 생략과 반어의 화법이다. 사진은 거울에 비친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건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말진 기자 시절, 출입하던 당의 대표가 갑자기 아침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쉴 새 없이 노트북에 받아 치던 차, 미소를 지었다. ‘잠시 쉴 수 있겠군.’ 선배 기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멋대로 판단하면 어떡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수록 중요한 말이다!”

여의도 생활을 더할수록, 과연 그랬다. 정치언어의 특징 중 하나는 생략과 반어의 화법이다.

정치인들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내뱉지 않는다. 공개적인 자리일수록, 협상의 직책에 있을수록, 정치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 위치일수록 그렇다.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다.

그러니 여당보다는 야당 의원들이 생략과 반어법을 적극 활용한다.

 ◇‘못할 것 없다’… 진짜?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9월 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9월 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필요하다면 이걸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말이다. 7일 MBC라디오 ‘심인보의 시선집중’과의 전화 인터뷰에서다. 문재인 대통령과 여야 5당 원내대표 간의 첫 여야정 국정상설협의체 회의 뒤 나온 합의문 중 선거연령 하향 조정 논의가 화제에 올랐다. ‘논의를 하겠다는 말이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김 원내대표가 그같이 답한 것이다. 언뜻 보면 찬성한다는 말 같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건 ‘그러나 찬성하지는 않는다’가 생략된 표현이다.

실제 합의문에도 ‘선거연령 18세 인하를 논의하고’라는 언급 자체에 의미를 두는, 사실상 쓰나 마나 한 표현으로 들어갔다(아래 관련기사 참조). 국회에서 계속 논의는 해왔으나 합의가 안됐던 사안이 바로 선거연령 하향 조정이다. 보수 야당으로서는 찬성하기 어려운 문제라서다. 표 계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연령이 낮을수록 보수 혹은 우파 정당 보다는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김 원내대표는 ‘강원랜드 국정조사’와 관련해서도 이 같은 화법을 썼다. 서울시 산하 서울교통공사의 이른바 ‘고용세습’이 논란이 되자, 야당에서 국정조사 요구가 터져 나왔고 모처럼 야권연대가 이뤄지는 듯했다. 그런데 정의당이 ‘강원랜드 채용 비리 의혹 국정조사’를 조건으로 건 것이다. 이 사안에는 한국당의 비박계 3선이자 김 원내대표와도 가까운 권성동 의원이 연루돼 재판을 받고 있다.

김 원내대표는 정의당의 요구에 당시 “못할 것 없다”고 밝혔다. 이 역시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속내는 ‘못할 건 없지만 받을 수는 없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할 생각이 없다’… 과연?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이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이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보수의 새 전사’라는 별칭을 얻은 이언주 바른미래당 의원의 한국일보 인터뷰에서도 생략의 묘수가 읽혔다. 이 의원은 바른미래당을 가리켜 “선명함이 없다”며 “우리(바른미래당) 시도는 실패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당을 깨야 한다’는 뒷말이 생략된 것으로 이해하면 과잉 해석일까. “중요한 건 가치집단을 만드는 일”이라는 이 의원의 말 속에도 ‘그러니 보수 우파가 헤쳐 모여 해야 한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 의원은 이런 말도 했다. “총선은 아직 생각하고 있지 않다.” 선거가 코 앞인데? 차기 총선은 2020년 4월로, 1년 반도 남지 않았다. 이 시점 이 의원이 보수의 새 가치를 들며, ‘보수ㆍ우파 대통합’의 불쏘시개 역할을 자처하는 것과 차기 총선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의원 자신도 “보수 분열을 봉합해서 결집하지 못하면 어차피 (당선이)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인이 하는 말의 진의는 행간에 있다.

다선 의원들이 한 목소리로 말하는 여의도의 ‘속담’ 두 개가 생각난다.

“모든 초선 의원의 꿈은 재선, 모든 재선 의원의 꿈은 대통령이다.”

“정치인이 정치하기 싫다는 말처럼 새빨간 거짓말도 없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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