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준호의 실크로드 천일야화] <32>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

티베트 제2의 도시 시가체의 타시룬포 사원에서 라마승과 신도들이 불탑을 돌고 있다.
티베트 3대 성스러운 호수 중 하나인 암드록초에 야크와 장족 남성이 서 있다. 기념사진 포인트다.

라싸에서 달라이라마의 겨울궁전 포탈라궁과 여름궁전 노블링카는 대조적이었다. 포탈라가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다면 노블링카는 연못과 정원으로 꾸며진 휴양처였다. 단층으로 길게 이어지는 담벼락에서 급경사 포탈라와는 다른 아늑함이 느껴졌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그의 겨울궁전이었던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여름궁전의 차이라고나 할까.

1959년 이 노블링카에서 스물 넷 청년인 달라이라마 14세는 중국 당국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인도로 망명했다. 51년 티베트를 합병한 중국이 달라이라마를 체포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던 때였다. 티베트를 탈출했던 그의 심정을 그려보며 라싸를 떠났다.

티베트에는 천장, 그러니까 독수리들이 시체를 뜯어 먹는 조장만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로는 수장과 화장, 미라까지 다양한 장례문화가 있었다. 메마른 땅에 나무조차 없던 자연환경에서 조장이 주를 이뤘겠지만 어린이는 수장, 범죄자는 토장, 고승들은 미라로 만들어 영탑에 모시기도 했다. 라싸 주위를 흐르는 강 곳곳에 수장터를 알리는 오색 타르초가 내걸려 있었다.

네팔로 이어지는 우정공로를 달리다 검문소를 통과했다. 그리고는 말로만 듣던 구절양장 고지를 오르기 시작했다. 감발라 패스다. 버스가 왼쪽으로 기울다 오른쪽으로 쏠리기를 수 십 차례 한 후 해발 4,280m 지점 이름 모를 휴게소에 섰다. 한 어미 뱃속에서 난 형제도 잡아먹는다는 사자개, 짱아오가 우락부락한 얼굴로 손님을 맞고 있다. 기념사진 찍으라며 1인당 10위안에 호객행위를 한다. 사자개 두 마리를 끼고 중간에 걸터앉는 기분은 약간의 두려움과 흥분이다. 고개를 딴 곳으로 돌리던 사자개 한 마리는 주인한테 뺨따귀 한 대 얻어맞고 카메라로 시선을 고정했다.

재주는 사자개가, 돈은 티베트 짱서방이 챙겼다. 몽골 초원에서도 재주는 독수리가, 돈은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챙기고 있으니 지구 최강 포식자 인간의 권세가 대단하다.

티베트 감발라 패스의 한 휴게소에서 장족 상인들이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여행객을 맞기 위해 사자개와 야크를 치장하고 있다.
해발 4,998m의 암드록초 전망대에 순례자와 여행객의 소원을 담은 타르초가 내걸려 있다.

해발 5,560m의 캄발라 고개를 넘으니 눈이 시리도록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푸른 하늘 흰 구름, 설산을 배경으로 코발트빛 암드록초가 파노라마처럼 다가왔다. 암드록초는 남초 마나사로바와 함께 티베트 3대 성스러운 호수다. 호수 주변에는 우리네 산사에서 볼 수 있는 돌탑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곳에서는 뭔가 빌어야 할 것 같았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면서 ‘가화만사성’이라고 썼던 타르초를 암드록초 전망대에 걸었다. 지금도 4,998m 전망대에는 그 타르초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겠다.

포르투갈에서 온 청춘 남녀 4명이 사진을 찍어달래서 어깨동무, 하트, 손가락 하트에다 공중점프까지 시켰다. 하늘로 뛰어오르면서 흥겨워하지 않는 여행자를 본 적이 없다.

티베트 3대 성스러운 호수인 암드록초 전경. 도로가 호수를 끼고 끝도 없이 이어진다.
설산을 병풍처럼 두른 해발 5,020m의 홍하곡에 티베트 전통복장의 장족 여인이 서 있다.

전통 복장을 입은 장족 아가씨들이 사진 호객을 하고 있는 해발 5,020m의 휴게소를 지나 장체의 펠코르체데 사원에 잠시 내렸다. 15세기 사카파 사원으로 출발했으나 티베트 불교의 모든 종파가 함께 머무는 곳으로 발전했다. 대법당 왼쪽에는 10만 불상을 모신 탑, 쿰붐 스투파가 웅장했다.

티베트 2의 도시 시가체에 도착한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라싸를 출발해 하루 종일 차에 시달렸더니 저녁이고 뭐고 만사 귀찮았지만 동네 야경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짝퉁 스타벅스 ‘신바크’(鑫巴克)가 알고보니 시가체 최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철관음 한 잔에 80위안이나 했다. 스타벅스 '싱바크’(星巴克)였다면 30위안 짜리 커피 한 잔으로 땡 쳤겠지만 팔자에 없는 호사를 누렸다.

라싸에 포탈라가 있다면 시가체에는 타시룬포가 있었다. 포탈라궁에 달라이라마가 있다면 타시룬포 사원에는 판첸라마가 머무르는 것이다. 추석인 9월24일 일찌감치 숙소에서 조상님께 절 두 번 하고는 시가체 서쪽의 타시룬포를 찾아 나섰다. 티베트 불교에는 닝마파 카큐파 사카파 겔룩파가 대표적 종파인데 타시룬포는 겔룩파 4대 사원 중 하나다.

티베트 불교의 최고지도자인 달라이라마는 관세음보살, 그 다음 서열인 판첸라마는 아미타보살의 화신으로 불린다. 모두 겔룩파다. 타시룬포 사원에 있었던 판첸라마는 17세기 달라이라마 5세의 스승이었다. 그러니까 달라이라마 5세가 스승의 환생 동자를 찾도록 명령하면서 판첸라마가 생겨난 것이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의 계보를 비슷하게 맞추기 위해 판첸라마 1∼3대의 환생 동자들도 소급해 추가하면서 스승은 판첸라마 4세로 후대에 알려지고 있다.

달라이라마나 판첸라마는 모두 세상을 떠나면 10개월 후부터 환생 동자를 찾는 작업이 시작된다. 그래서 6살이 될 때 환생 동자를 낙점하게 된다. 달라이라마와 판첸라마는 엎치락뒤치락 서로가 서로의 어린 환생 동자를 찾아 교육했지만 절대로 판첸라마가 정치권력을 쥐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달라이라마는 잇따라 요절한데 비해 판첸라마가 장수하면서 양자간 관계가 애매해졌다. 그러다 달라이라마 13세가 1904~12년 영국과 중국군에 쫒겨 몽골과 베이징, 인도로 떠돌아다닐 무렵 판첸라마 9세가 군주처럼 권세를 부리는 엇박자가 연출됐다.

1913년 귀국한 달라이라마 13세가 군대창설, 영어학교 건립 등 티베트 근대화를 위해 사원마다 비용을 분담토록 했는데 판첸라마 9세는 자신과 타시룬포 사원에 대한 압박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23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 세상을 떠났고, 판첸라마 10세는 달라이라마 대신 중국 국민당정부의 공인 과정을 통해 자리에 오르게 된다.

티베트 장체의 펠코르체데 사원에 10만 불상을 모신 쿰붐 스투파가 웅장하게 서 있다. 이 곳은 15세기 사카파 사원으로 출발했으나 티베트 불교 모든 종파가 함께 머무는 곳으로 발전했다.
판첸라마 11세가 있는 시가체 타시룬포 사원에서 승려들이 걷고 있다.

1952년 라싸로 돌아온 판첸라마 10세는 달라이라마 14세와 만났지만 59년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할 당시 티베트에 남으면서 둘은 또 딴 길을 걷게 된다. 판첸라마 10세는 중국정부의 실정을 고발하다 10년 가까운 감금생활도 했기 때문에 친중국 인사로 분류하기는 애매하다. 그는 1989년 1월 문화대혁명때 파괴된 불탑 낙성공양을 위해 타시룬포 사원을 찾았다 가슴통증으로 숨졌다. 추운 겨울 오랜 시간 의식을 주재하다 심장병이 걸렸다고도 하고 중국정부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기 때문에 암살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같은 해 10월 달라이라마 14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럼 현재 달라이라마 14세와 판첸라마 11세는 어떤 사이일까. 달라이라마는 1995년 여섯 살의 치에키 니마를 환생 판첸라마로 공표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즉시 이 소년을 체포하고는 기알첸 노르부를 판첸라마 11세로 즉위시켰다. 장쩌민 주석은 당시 타시룬포 사원의 휘호도 전달하면서 티베트 불교에 대한 중국정부의 위상을 과시했다. 그러니 티베트인과 외부 세계에서 판첸라마가 꼭두각시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티베트 곳곳에는 신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사다리 그림이 그려져 있다.

타시룬포 사원에서 판첸라마 10세의 영탑을 둘러보던 송광사 큰스님이 가이드에게 판첸라마 11세에 대한 세간의 의혹을 물었다. 느닷없이 “스톱”, 이 한 마디를 내뱉은 50대 후반의 조선족 가이드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판첸라마 11세는 진짜”라고 강변하는 그는 티베트인이 아니었다.

jhj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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