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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석의 성경 '속' 이야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근거는 오직 '믿음' 뿐이다

입력
2018.11.03 04:4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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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성서, 유일한 책일까? 

 천지창조 담긴 창세기 1,2장 

 수메르ㆍ바벨론 신화와 유사 

 문명간 종교ㆍ문화 교류의 증거 

아트라하시스 신화가 적혀있는 설형문자 토판. 영국박물관 소장.
아트라하시스 신화가 적혀있는 설형문자 토판. 영국박물관 소장.

신학과 학부 학생 한 명이 느닷없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고민이 되는 것이 있다며 내 앞에 종이를 들이민다. 알 수 없는 문자로 무언가 잔뜩 적혀 있었다. 학생이 말하기를, 얼마 전부터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고대 문헌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성경의 창세기와 너무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과연 성경이 유일무이한 신의 계시가 맞는 것인지 고민이 된다고 했다.

산스크리트어나 문헌에는 문외한이라 정말 창세기와 유사한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내 책장에서 네댓 권의 책을 뽑아 보여주고 싶었다. 고대 이스라엘의 창세기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주변 민족의 신화들을 담은 책이었다. 산스크리트어 문헌까지 보지 않아도, 성서와 유사한 내용의 이야기들은 이미 충분히 밝혀져 있다.

성서학과 기독교가 제일 앞서 흥왕했던 서구사회에서도 거의 19세기까지는 이런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서구 강국들은 중동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을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이때 문서들도 많이 발견되었고, 해독하여 본 결과 내용이 성서 이야기들과 유사하여 당시 기독교인들을 꽤 당황시켰다.

특히 창조 이야기들이 주목을 받았다. 하나님이 태초에 말씀으로 7일 동안 세상을 지으시고, 흙을 빚은 다음 생기를 넣어 인간을 만드셨다는 창세기 1~2장의 기록은, 유대ㆍ기독교만의 유일한 이야기일 것으로 믿어져 왔다. 그러나 지금의 이라크 니느웨(Nineveh)나 십발(Sippar), 닙푸르(Nippur) 등지에서 발견된 수메르ㆍ바벨론 문명의 창조 이야기들은, 성경의 창세기 기록과 견줄 만큼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똑같은 것은 아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는 오히려 전혀 유사해 보이지도 않는다. 색다른 버전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벨론의 신화 ‘에누마 엘리시’에서는 마르두크라는 신이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생기가 아니라 그가 무찔러 죽인 다른 신의 ‘피’를 섞었다. 창세기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권능 있는 창조 행위가 부각된다. 하지만 에누마 엘리시에서는 혼돈과 공포의 세력을 무찌르고 왕이 된 마르두크를 찬양하고 기념하는 행사 가운데 하나로, 인간과 세상이 창조된다. 에누마 엘리시에서 타파된 혼돈과 공포는 창세기의 창조 직전 혼돈과 유비되기도 한다. 정말 엇비슷하다.

혼돈의 괴물 티아마트와 싸우는 태양신 마르두크의 모습을 새긴 토판. 1853년 니느웨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혼돈의 괴물 티아마트와 싸우는 태양신 마르두크의 모습을 새긴 토판. 1853년 니느웨에서 발굴된 유물이다.

또 다른 신화 ‘아트라하시스’는 노아 홍수의 이야기와 유사하다. 두 이야기에서 모두 신들이 인간을 물로 파멸시키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아트라하시스와 노아만이 유일하게 미리 알고 홍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대한 배를 만들어 생존한다. 홍수가 지난 뒤에는 배에서 나와 신에게 제사부터 드린다. 서로 많이 닮은 이야기다. 그런데 인간을 파멸하기로 한 이유는 각각 다르다. 아트라하시스에서는 인간들이 너무 시끄러워 죽이기로 결정하지만, 노아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죄악이 원인이다. 노아 이야기에는 윤리적 색채가 있는 반면,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는 사회-인류학적 요소가 보인다. 인간이 시끄러웠다는 것은 그들의 과잉 번성을 암시하는 것이며, 원시사회에서의 과잉 번성은 식량부족과 터전 경쟁으로 이어져 미래 사회를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

창조 이야기 말고도 여러 장르의 이야기들이 서로 유사하다. 바벨론 신정론(Babylonian Theodicy)은 성경의 욥기와 매우 유사하다.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사람과 그 친구들 간의 심오한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시편도 예언자들의 신탁도 주변 민족들의 문헌과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우리는 이와 같은 유사성을 보고 문명 간의 직접적 접촉에 의해 그 콘텐츠가 회람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유사한 문헌이 발견되었다 하여 서로 간에 반드시 ‘직접적’ 접촉이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지역적 회람을 강조하다 보면 어느 문명이 다른 어느 문명을 마치 표절이라도 한 것처럼 시비가 붙는 경우가 있다.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주변의 문화적 강국에 비해 문명과 그 체제가 늦게 발달한 이스라엘이 이웃의 것들을 많이 차용한 것으로 본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원시시대의 문화 현상이 이처럼 도식적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몇 학자들은 서로 지역이 분리되어서 접촉이 없어도 유사한 생태학적 사회적 조건 속에서는 비슷한 문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의 콩쥐 팥쥐 이야기와 거의 유사한 서구의 신데렐라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이 이야기는 서구에서 한국으로 흘러 들어온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어쩌면 서구사회나 우리나라나 어디든지 딸들과 계모 사이에는 갈등이 있기 때문에 유사한 이야기가 서로 간의 접촉이 없이도 각자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잘 때 사용하는 베개는 고대 유럽 사람들도 사용하였고, 고대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러하였다. 누가 누구에게 전수해준 것일까? 서구인이건 한국인이건 인간으로서 같은 신체 조건을 갖추었기에 서로간의 접촉이 없어도 베개는 각자 지역에서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닐까?

이스라엘의 성서 내용이 이웃 문화에 절대 빚지지 아니한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때 경직된 학문적 성서 연구가 지나치게 성서의 고유성을 무시하려고 했기에, 혹 독자들 가운데에 어느 편향된 정보를 가지고 있으신 분들이 있을지도 몰라 하는 말이다.

사실 고대 서아시아 지역 간에는 문화적 접촉과 이동은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본래 문화라는 것이 주변 이웃들과 교류하면서 발달하기 마련이다. 성경은 종교적 계시로서 유일무이한 것이지, 이 계시의 자료가 되는 역사와 문화적 경험은 당연히 이웃 문명과 공유하는 것이다. 그릇 위에 담긴 어떤 요리가 유일한 것이지, 그 요리의 식재료들은 다른 요리에서도 발견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사건이 어떤 지역에서 벌어졌다고 하자. 그리고 그 일은 꽤 기념비적인 것으로 기리어지게 되었다. 그 사건과 그 경험은 이 일이 벌어진 그 지역에만 한정되어 갇혀만 있을까? 인구의 이동과 지역 간의 교류로 당연히 한 이야기는 다른 지역 다른 민족에게로 스며든다. 전달된 이야기는 다시 그 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상황에 따라 색다르게 발전하여 색다른 버전으로 만들어진다. 이 때문에 이웃 간에 한 이야기의 여러 버전이 발견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고유의 것이 다른 지역의 종교ㆍ문화적 유물로 변천하여 남겨졌을 것이며, 역으로 다른 지역의 종교ㆍ문화적 산물이 이스라엘로 유입되어 발달하고 성경에 남겨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잠언의 일부는 이집트의 문헌과 거의 유사하기도 하다.

찾아온 학생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성경은 내용상 유일무이한 문헌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이 유일무이한 신의 ‘말씀’, 즉 계시는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실증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신앙인들의 ‘믿음’뿐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히브리서 1장 3절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창세기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벌어진 역사적 과학적 사실로 보기도 하고, 어떤 신앙인들은 상징적, 은유적, 문학적, 신학적인 기록으로 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기록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느냐 아니냐의 문제다. 유일하기 때문에 혹은 실증될 수 있기에 성경은 진리일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큰 착각이다. 참고로, 믿음은 배워서 얻을 수 있지 않다. 믿음은 매우 고유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상담이 깊어질 때 즈음, 다행히(?) 다른 학생이 연구실에 찾아와 이야기를 간신히 마칠 수 있었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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