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급진전, 대북제재 완화 언급에
美, 비건 파견과 워킹그룹으로 의문 표시
한미, ‘신뢰의 덫’ 안 걸리게 보폭 조율을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북미 협상 성공의 관건은 상호 신뢰 구축이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근 70년간 적대시해 온 미국과 북한이 서로를 믿게 되느냐 여부는 비핵화를 가를 핵심 변수다. 작금의 북미 협상은 양측이 신뢰 구축 방법을 모색하는 단계다. 하지만 입장차가 크다. 북한은 종전선언과 대북제재 완화를 해줘야 미국을 믿고 비핵화를 진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미국은 비핵화 조치, 즉 핵시설∙핵무기∙핵물질 리스트 제출과 검증이 먼저 이뤄져야 북한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북미 간 이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메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바라는 대로 국면이 바뀌어 갈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의 선택지가 점점 줄어드는 형국이다. 미국이 북미 비핵화 협상의 장기화를 염두에 두는 신호가 포착된 뒤부터 남북의 조급함은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유럽 순방 중 문 대통령의 대북제재 완화 카드 제시는 정부의 조바심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방한 행보를 보면 대북제재 완화 요구는 한미 공조 측면에서 미국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킨 요인이 됐다. 문 대통령의 대북제재 완화 카드는, 비록 비핵화를 전제한 것이지만, 미국의 대북정책 방향과 어긋나고 시점상으로도 적절치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최근 하와이에서 진행된 한미 안보포럼 행사 중 만난 미국 싱크탱크 관계자는 “(대북제재 완화를 강조한) 문 대통령의 유럽 순방은 실패”라며 “문 대통령의 태도는 북미협상에 회의적인 미국 사회의 흐름을 강화하면서 문 대통령을 북한 비핵화를 믿는 유일한 지도자로 고립시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 미국 조야(朝野)는 북미 협상에 비관적인 분위기가 우세하다. 여야, 민관 구분 없이 과거 협상경험 등을 근거로 북한을 신뢰하지 않는다. 미국이 추구하는 민주적 가치에 반하는 세습 독재자라는 점에서 김 위원장에 대한 거부감도 크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포개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남북군사합의, 남북철도∙도로 연결, 산림 협력, 개성공단 방문 등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속도를 올리고, 그때마다 대북 제재 예외 인정을 요구하다 아예 제재 완화까지 거론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다. 비건 대표가 방한해 대북 정책을 관장하는 ‘외교안보 빅4’를 두루 만나고, 미국 정부가 우리 기업과 금융기관에 남북경협 자료를 요구하거나 대북 제재 이행을 강조한 것 등은 문재인 정부에 대한 미국의 이런 의문을 반영한다. 또 비핵화와 대북 제재를 다룰 한미 워킹그룹의 뒤늦은 설치는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믿음이 흔들렸다는 반증이다. 물론 정부가 미국과 대북 정책을 조율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됐다는 의미가 있긴 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미국이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정부의 대북 정책 추진에 일일이 개입하게 됐다는 것을 뜻한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나 남북관계 개선으로 북미 협상을 견인하려던 과정에서 생긴 남북 ‘과속스캔들’이 초래한 결과다.

이제부터라도 대북 정책과 한미 관계 전반을 제대로 점검해봐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으로 북한 비핵화를 견인한다는 정부 전략은 여전히 유효하다. 문제는 남북관계 개선과 북미 협상 간 적절한 보폭 조절이다. 문 대통령 언급대로 제재 완화는 북한이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 조치를 할 경우 당연히 수반돼야 하나 현 단계에선 미국이 수용할 수 없는 카드다. 그것을 문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다는 점에서 제재 완화 언급은 고도의 계산된 발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한미 간 불협화음은 북한 앞에서 굳건해야 할 한미 동맹을 흔들 수 있다. 북미 관계처럼 한미 관계가 대북 정책 추진 과정에서 서로를 의심하는 ‘신뢰의 덫’에 걸리게 된다면 그것은 한반도 평화 여정에 치명적이다. 미 중간선거 이후 비핵화 협상 전개 양상이 안갯속인 가운데 정부에 더 치밀한 대응이 요구되는 이유다.

논설실장 apri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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