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이란 매개로 둘러앉은 사람들. 2001년 발생한 이른바 서강대 교수 성폭력 피해자 최아룡(마이크 잡은 이)씨가 사건 17주년을 맞아 10월의 마지막 날 특별한 파티를 열었다.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최씨의 가족과 지인, 그를 도왔던 활동가, 그에게서 힘을 얻고자 하는 피해자를 비롯해 40여명이 모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기자를 하는 동안 꼭 연재하고 싶은 기사가 있다. ‘미투 성공스토리’다. 수많은 미투가 이어졌지만, 그 끝이 속 시원한 ‘권선징악’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 ‘공개 투쟁’을 결심하고 사실을 밝혀도 돌아오는 건 ‘당할 땐 가만 있다가 왜 이제 와서 그러느냐’는 음모론, ‘가해자 인생 망쳐 좋을 게 뭐냐’는 동정론, ‘그렇게 까다롭게 구는 직원 불편하다’는 배척론이다. 게다가 소송은 얼마나 지난한가. 재판을 준비하고 출석하고 피해 사실을 복기하고 가해자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경제적, 심리적 부담과 피해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안희정 사건’의 피해자 김지은씨는 그래서 “무엇보다 가장 힘든 건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했다. 가해자는 또 얼마나 교활한가. 대개 권력도 재력도 인맥도 지닌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기득권을 활용해 저항한다.

그래서 간절히, 성공하는 미투 이야기를, 그러기까지 감내한 눈물과 상처, 그들의 손을 잡아준 ‘위드유’들의 연대를 담은 기사를 줄줄이 쓰고 싶은 거다.

그런 시리즈를 시작한다면, 단연 첫째에는 최아룡씨가 소개될 것이다. 2001년 대학원 지도교수에게 당한 성폭력에 정면 대응을 결정하고, 2년 뒤에는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고 미투했다. 10월 31일은 그녀가 피해를 당한 지 17년 되는 날이다.

누군가는 옛 가요 제목처럼 ‘잊혀진 계절’이 되기를 바라며 강단에 서고 있겠지만, 그녀는 살아 남아 17주년을 기념하는 작은 핼러윈 파티를 열었다. 그녀를 지지하고 도왔던 여성단체 활동가들, 가족, 친구, 또 그녀의 성공담에 자극 받고 용기를 얻으려는 또 다른 피해자들이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모였다. 이날 마주한 40명 남짓의 우리는, 이런 얘기를 나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억해서 기록하고, 기록해서 말하고, 말해서 싸워야 해요. 말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답니다. 피해자 같지 않다고요? 피해자다운 게 뭔가요. 우리는 피해자라서 주체적인 해결자이기도 합니다.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대응을 시작했더니, 교수를 감싸며 주위에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그 돈과 시간을 들여 유학까지 다녀와서 어렵게 교수된 사람, 너무 아깝지 않느냐고. 그럼 나는요?

미투운동이 확산되니까, 우리 회사는 이제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기만 해도 가해자를 해고하는 규정을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어느 순간 피해자를 가해자 취급하는 분위기가 생기더군요. 성폭력을 당했다는 진실은 어디로 갔나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그래서 잊으면 안돼요. 다쳤을 때 ‘아야!’ 하고 소리라도 질러야, 주위에서 쳐다보죠. 그러면 우리는 인간이니까, 마음이 있는 인간이니까 누가 아파하면 쳐다보고 어루만져 줘야죠. 아닌 건 아니라고 함께 외쳐줘야죠.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괜찮아졌다고 생각해도 아직도 혼자 눈 뜬 새벽, 마음이 쿵 하고 내려 앉아 나락으로 떨어져요. 평생 갖고 가야 하는 아픔이겠죠. 오늘이 이제는 당신에게 가장 기쁜 날, 승리의 날로 기억되길 바라요. 17년 동안 생존해 주어 고마워요. 나도 이렇게 살 수 있겠구나, 살아 남아 승리할 수 있겠구나, 용기를 가져요.

최아룡씨는 “끝이 무엇일지 알지 못한 채 시작한 길”이라고 말했다. “내가 당한 사건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피해자에게 방어막이 되고, 이렇게 씩씩하게 해결도 할 수 있다는 롤모델이 되고 싶었다”고도 했다. 최씨는 일찍이 그런 본보기를 찾지 못했다.

그녀의 투쟁에 처음부터 함께 했던 여성학자 권김현영씨가 “오늘 온 다른 사건의 피해자들이 큰 힘을 얻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왜요? “17년을 싸운 가장 쎈 사람을 만났으니까!”

미투의 해피엔딩은 이룰 수 없는 꿈이 아니다. 이렇게 이어진 우리가 그 스토리의 공동 작가가 되기를.

김지은 디지털콘텐츠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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