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텃밭에서 배추벌레를 잡고 있었다. 일절 농약을 뿌리지 않고 배추를 키우려니 일일이 손으로 벌레를 잡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벌레를 잡는데, 경로당으로 출근하는 이웃 할머니 한 분이 벌레 잡는 날 보고 딱하다는 듯 말했다. 아, 고선상, 왜 그 고생을 혀요. 농약을 확 뿌리면 될 틴디! 나는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가벼이 목례를 건네고 계속 벌레를 잡았다.

오늘따라 가을볕이 쨍쨍해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는데,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아, 시원해! 바람이 불자 앞집 은행나무에서 흩날리는 노란 은행잎들이 우리 텃밭까지 휘휘 날아온다. 그렇게 날아온 은행잎들은 텃밭이며 길 위에도 금세 노랗게 쌓였다. 나는 벌레를 잡던 일손을 멈추고 혼자 중얼댄다. 오, 나 같은 가난뱅이도 황금 방석에 앉을 수 있겠구나!

실제로 길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은행잎이 깔린 황금 방석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데, 집 안에 있던 아내가 대문을 열고 나와 길바닥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싱긋거린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벌레는 안 잡고! 보시다시피 황금 방석에 이렇게 앉아 있지 않소. 내 대꾸를 듣고 한참 깔깔대고 웃던 아내가 정색을 하고 말한다.

“식물들은 낙엽 한 장을 버릴 때에도 아무렇게나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주 공을 많이 들여서 버린대요. 식물은 곧 떨어뜨릴 잎에 갖은 정성을 들여 만든 식이유황을 비롯한 면역물질을 가득 쌓은 다음 땅에 떨어뜨리는 거죠. 여기 떨어진 은행잎처럼 땅에 떨어진 잎들은 썩어 거름이 되는데, 거름 속에 들어 있는 유황 성분이 땅을 소독하여 해로운 병균이 번식하지 못하게 하고, 작물에 해를 끼치는 벌레 알이 깨어나지 못하게 한다네요.”

어떤 식물학자의 책에서 읽은 얘기라는데, 한 소식(!) 한 느낌이었다. 가을이면 매일 길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쓰레기처럼 여겨 빗자루로 쓸어 태워버리며 얼마나 투덜거렸던가. 또 조락(凋落)의 계절마다 낙엽과 늙어 가는 내 인생을 동일시하며 얼마나 울적해했던가. 아내가 읊조려 준 것처럼 식물들이 낙엽 한 장을 버릴 때도 아무렇게나 버리는 게 아니라 아주 공을 많이 들여서 버린다면, 시들어 떨어지는 낙엽의 몸짓은 얼마나 고맙고 성스러운 것인가. 그 몸짓을 생의 소멸로만 읽어온 내 사색이야말로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

문득 얼마 전에 읽은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 ‘예찬’이 떠오른다. 투르니에는 자기가 만난 존재와 사물들을 깊고 섬세한 시선으로 관찰하며 ‘예찬’하고 있는데, 정원사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잡초들조차 예찬하고 있다. 예찬이란 ‘매우 좋게 여겨 찬양하고 기리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창세기에서 조물주가 세상만물이 지어질 때마다 ‘아, 좋구나!’라며 경탄을 발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사는 세계는 본래부터 천연색이 아니라 흑백의 세계, 근본적으로는 무채색이다. 이런 현실에 색깔을 부여하는 것은 발견의 눈이고 예찬인 것이다. 투르니에는 말한다.

“예찬보다 좋은 것은 없다. 어떤 아름다운 음악, 한 마리 우아한 말, 어떤 장엄한 풍경, 심지어 지옥처럼 웅장한 공포 앞에서 완전히 손들어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투르니에는 자기가 동무해 살아가는 만물을 예찬할 줄 모르는 이는 비참한 사람이라고 덧붙인다. 그런 비참한 사람은 면하고 싶어, 아니 이 세계의 무궁무진한 풍요로움을 만끽하며 살고 싶어 빛바랜 낙엽도 벗 삼기로 했다. 나는 곧 빗자루를 들고 나와 길바닥에 깔린 낙엽들을 정성껏 쓸어 모아 배추밭 고랑에 넣어주었다. 또 한 차례 바람이 불자 은행잎들이 축복처럼 솨솨솨 날아와 내 머리 위로 흩날렸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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