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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No 반말, No 낙오, No 뒤풀이... 오픈런을 아시나요

입력
2018.10.30 18:00
수정
2018.10.30 19:12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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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회원 개념 없고 참가자 나이ㆍ직업 안 따져… 서로에게 구속 없이 운동에만 집중

’당뛰우뛰’(당신이 뛰면 우리도 뛴다)라는 오픈런 크루 멤버들이 23일 서울 마포구 평화의 공원을 달리고 있다. 류효진 기자
’당뛰우뛰’(당신이 뛰면 우리도 뛴다)라는 오픈런 크루 멤버들이 23일 서울 마포구 평화의 공원을 달리고 있다. 류효진 기자

가을 밤을 달리고 싶었다. 혼자 보단 함께 뛰고 싶었다. 지난 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 인근 평화의 공원에서 ‘당뛰우뛰’(당신이 뛰면 우리도 뛴다)라는 ‘오픈런 크루’의 모임에 직접 참가한 이유다.

‘오픈런’은 매주 정해진 시간에 모여 달리기를 하되 기존 멤버들 외에 새로운 사람들도 얼마든지 참가할 수 있는 방식을 말한다. ‘당뛰우뛰’는 매주 화요일 오후 8시에 모여 달린다. ‘크루’는 원래 승무원을 뜻하지만 요즘에는 SNS를 기반으로 하는 신개념 운동모임이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오후 7시 30분경부터 러닝화, 트레이닝복 차림의 사람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반갑게 손을 맞잡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부는 어색한 듯 겨우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당뛰우뛰 크루의 모토는 ‘No 알코올’ ‘No 반말’ ‘No 낙오’. 정식 회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누가 오는지, 그 사람의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직업이 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이날도 28명이 모였는데 초창기부터 참여했던 이들부터 처음 온 사람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스트레칭으로 가볍게 몸을 푼 뒤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하기 전 허태성(31)씨가 ”사진 한 번 찍고 갈께요“라고 외쳤다. 허씨는 5개월 전부터 꾸준히 당뛰우뛰 크루에 참가하고 있다. 허씨의 말에 오와 열을 찾아 전통적인 사진 대형으로 선 사람은 기자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사진 구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각자 원하는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전통적인 구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포즈로 사진 찍는 멤버들. 류효진 기자
전통적인 구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포즈로 사진 찍는 멤버들. 류효진 기자

평화의 공원을 출발해 양화대교를 건너 당산역까지 약 10km 구간이 이날의 달리기 코스였다. 참가자들은 각자 실력에 맞게 5분30초(1㎞를 5분30초에 주파), 6분30초, 런앤워크(run and walk)의 초보자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모든 그룹에는 베테랑 러너인 페이서(pacerㆍ속도를 조정해주는 사람)가 한 사람씩 붙었다. 도착 시간을 최대한 맞추기 위해 초보자 그룹이 먼저 출발하고 숙련자 그룹은 나중에 출발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No 낙오’란 모토가 떠올랐다.

기자는 5분30초 구간에 섰다. 한강의 시원한 바람을 맞는 기분은 상쾌했다. 7㎞쯤 지났을 때 다리에 힘이 풀리고 허벅지가 뻐근해졌지만 양화대교에서 보이는 기막힌 야경에 잠시 피로를 잊었다. 양화대교 중간에서 참가자들은 잠시 멈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기록 단축이나 순위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스트레칭으로 몸을 푸는 사람들. 류효진 기자
스트레칭으로 몸을 푸는 사람들. 류효진 기자
’당뛰우뛰’라는 오픈런 크루 멤버들. 류효진 기자
’당뛰우뛰’라는 오픈런 크루 멤버들. 류효진 기자

10㎞를 완주하고 마무리 스트레칭까지 끝나자 마치 학교를 파하는 종소리를 들은 학생들처럼 참가자들은 분주하게 해산하기 시작했다.

‘당뛰우뛰’ 크루의 대장(멤버들이 이렇게 부름)인 설립자 백인춘(40)씨는 2년 전 다이어트를 하려고 달리기를 시작했다가 혼자 뛰는 게 지루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처럼 혼자 달리는 사람 몇 명에게 연락을 하다가 이 크루를 만들게 됐다고. 러닝을 하면서 가장 좋은 건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거라고 말하는 백씨지만 ‘오픈런’에 처음 온 누구에게도 먼저 인사를 하거나 다가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직업, 나이, 이름을 몰라도 같이 달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유다. 백씨는 “각자 직장에서 조직 생활하기도 힘든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인위적인 소속감을 얻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볍게 와서 가볍게 뛰는 건데 굳이 술을 통해서 친해질 필요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날 처음 왔다는 양혜지(28)씨는 올 초부터 마라톤에 관심이 생겼다. 운동은 하고 싶은데 혼자 달리려니 실력 향상이 더뎠다. 하지만 멤버끼리 똘똘 뭉쳐 있는 기존 소모임은 꺼려졌다. 그는 “다른 모임은 1주일에 한 번은 꼭 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생겨 불편했다. 운동하러 와서까지 자기소개를 하고 나를 포장하는 데 에너지를 쓰고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모임 다음 날 주최자 백씨는 단체 카카오톡 방을 ‘폭파’(없앤다는 뜻)함과 동시에 다음 오픈런을 예고했다. 회비도, 카톡방 관리자도 없이 이걸로 끝이다. “적당한 거리감이 좋은 모임을 만든다”는 한 참가자의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오픈런’과 비슷하면서 약간 다른 ‘번개런’도 있다. 번개런은 정해진 날짜 없이 하루 이틀 전 인스타그램 메시지 등을 통해 갑자기 공지를 해서 함께 뛴다. 지난 19일에는 ‘맛동산 크루’라는 번개런에 참가했다.

남산 북측 순환로를 달리는 약 7㎞의 코스였다. 오후 7시, 충무로역에 도착하니 10명이 모여 있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대화를 보니 서로 잘 모르는 눈치였다. 스트레칭을 시작하고 5명씩 그룹을 나눠 달리기를 시작했다. 밤에 달리는 남산은 상쾌했다. 온종일 사무실에서 탁했던 눈과 폐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맛동산’은 ‘당뛰우뛰’와 달리 뒤풀이가 있는 크루다. ‘힘껏 달리고 맛있게 먹자’를 모토로 한다. 이날도 러닝 후 동대입구역 근처에 소문난 물갈비 맛집을 찾았다. 꼬치구이를 안주로 한 2차에 이어 마지막 남은 4명의 멤버와 함께 새벽 3시까지 김치찌개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할 때 어색했던 공기가 풀리면서 사람들의 입도 풀렸다.

번개런, 오픈런이 끝난 뒤 이뤄지는 방폭.(오른쪽) 왼쪽은 방 폭파 통보 후에도 나가지 않는 참가자들을 방장(주최자)이 내쫓는 모습.
번개런, 오픈런이 끝난 뒤 이뤄지는 방폭.(오른쪽) 왼쪽은 방 폭파 통보 후에도 나가지 않는 참가자들을 방장(주최자)이 내쫓는 모습.

그러나 역시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다음 날 식사, 술에 들어간 비용을 1,2,3차에 참가한 사람 수대로 정확히 나눠 정산이 끝나자 ‘카톡 방을 나가 달라’는 메시지가 도착했다. 같이 달리고 떠든 ‘정’에 내심 아쉽기도 했지만 참가자들은 다음에 볼 사람은 또 보자며 ‘쿨’하게 퇴장했다. 한번 만나서 운동하고 놀았으니 그걸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번개런 ‘맛동산’의 주최자인 정요정(32)씨는 5년간의 방송 작가 일을 그만두고 훌쩍 떠난 포르투갈의 포르투서 러닝을 시작했다. 에세이 작가를 꿈꾸는 그는 남산을 혼자 뛰는 게 힘들어서 두 달 전쯤 인스타그램에서 같이 달릴 사람을 구한 게 계기가 돼 번개런을 열게 됐다. 정씨에게 러닝의 최우선 목적은 어디까지나 즐거움이다. 그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영감을 얻고 저도 그 사람한테 에너지를 주는 건 좋다. 하지만 주객전도된 것에 얽매여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는 않다”고 힘줘 말했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석경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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