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직업뿐 아니라 직장명, 직위까지 묻는 A식품회사의 올해 하반기 신입 공채 입사지원서. 해당 기업 채용 홈페이지 캡처
부모의 최종학력을 묻는 B제약회사의 신입 공채 입사지원서. 해당 기업 채용 홈페이지 캡처

올해로 취업준비생(취준생) 2년차인 김모(26)씨는 이력서에 부모의 직업란을 채워 넣을 때가 가장 힘 빠질 때라고 털어놨다. 김씨의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이혼 후 요양보호사로 밤낮없이 일하며 대학까지 뒷바라지 해왔다. 그 점에 대해 늘 감사해 왔지만, 이력서를 쓸 때면 ‘우리 부모님도 그럴듯한 직업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는 것. 김씨는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저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며 “이혼 가정이라는 게 흠은 아니지만 이력서에 쓰긴 꺼려져 연락도 닿지 않는 아버지의 직업을 써넣을 때도 있다”고 했다.

하반기 공채가 한창 진행중인 25일 노동계에 따르면 채용과정에서 구직자 본인뿐 아니라 가족 전반의 정보를 요구하는 사례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공공기관은 지난해 정부가 직무와 무관한 정보를 이력서에 쓰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며 부모에 대한 사항도 묻지 않게 되었지만, 사기업은 여전히 부모의 직업은 물론 직장명, 직위도 모자라 최종 학력까지 기재하라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강원랜드, 시중은행에 이어 최근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까지 친인척 채용비리 의혹이 하루가 멀다 하고 폭로되는 상황에서 이력서의 ‘부모 직업란’은 취준생을 두 번 울리고 있다.

구직자들은 오래된 기업일수록 보수적인 채용문화가 굳어져 이력서나 면접에서 으레 부모의 ‘스펙’을 묻는 사례가 많다고 말한다. 식품회사 취업을 준비하는 이윤미(23)씨는 “삼양이나 오뚜기처럼 평소에 이름을 들어본 유명회사일수록 오히려 부모님의 직업을 쓰라고 요구한다”면서 “한번은 일부러 가족사항을 빈칸으로 비워뒀더니 면접에서 ‘왜 안 써냈냐’고 불쾌한 티를 내더라”고 전했다. 설립 100년을 넘긴 기업이 많은 제약업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김모(27)씨는 “제약업계에서 부모님의 직업은 ‘필수 기재사항’이나 다름없다”면서 “영업은 인맥이 중요한데, 병원장이나 의사 자식이라고 하면 환영하지 않는 회사가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구직자들은 이력서의 해당 항목이 자칫 특혜나 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채용청탁까지는 아니더라도 임직원의 자녀나 친척이 채용 과정에서 가산점 등 특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6년 고용노동부가 2,769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벌인 ‘단체협약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의 25.1%에 달하는 694개 사업장이 재직자 자녀 우선 채용 조항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대학생 윤석민(26)씨는 “한 은행의 최종면접에서 면접관이 다른 지원자에게 ‘아버지가 이 회사에 다니냐’고 묻더라”며 “아니나다를까 그 사람이 합격했다는 말을 듣고 허무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현행 법으로 이를 규제할 방안은 없다. 고용정책기본법 7조에서 근로자를 채용할 때 성별과 종교, 학력 등을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지만 부모의 학력과 직업, 직위 등에 따른 차별 금지 규정을 별도로 두지는 않고 있다. 국회에 이력서에 출신지, 부모 직업 등을 요구할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안이 발의됐으나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고용부 역시 “경영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가 될 수 있다”면서 법 개정에 미온적이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관행적으로 가족사항에 대한 문항을 유지해왔더라도 특혜 시비를 막기 위해선 이런 문항을 선제적으로 없애야 한다”고 꼬집었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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