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주든지, 헌혈을 하든지” 자선 콘서트하며 후원 요청
안락한 삶 버리고 “하루 12만 프랑 모금” 고난의 길로
비트 리히너는 전쟁과 크메르루주의 폭정, 내전의 근 40년을 겪은 캄보디아에서 25년간 가난한 어린이 환자들을 돌본 스위스 의사다. 환자만 치료한 게 아니라 5개의 아동전문병원을 설립했고, 의료인력을 양성했다. 그러느라 그는 정작 진료보다 운영비 마련하러 다니느라 동분서주했고, 가난하다고 목숨의 값어치도 싼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시키느라 고심했다. 2015년 12월 'SCHWEIZER ILLUSTRIERTE' 사진. beat-richner.ch

캄보디아 씨엠레아프(씨엠립, Siem Reap)의 앙코르 와트를 여행한 이라면, 오다가다 어쩌면, 남문에서 도보로 5분 남짓 거리의 아동 전문병원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Ⅶ)’ 병원 의사 ‘비토첼로(Beatocello)’의 자선콘서트 홍보 입간판을 봤을 수도 있다. 혹시 짬이 나서 거기 들렀다면, 어린이 환자와 보호자들, 관광객들에 둘러싸인 비토첼로의 바흐나 카잘스, 혹은 자작곡 연주와, 그 연주를 배경음악 삼아 판소리 사설처럼 읊조리는 캄보디아의 의료 현실과 자기 병원 이야기를 듣기도 했을 것이다. 토요일 저녁, 관광 성수기엔 목요일까지 매주 두 차례 열곤 하던 그 콘서트의 마지막 멘트는 으레 후원 요청이었다. “나이 든 방문객은 돈을, 청년들은 헌혈을 해달라. 청년도 노인도 아니면 둘 다 기부해달라.” 그의 말에 대개는 웃지만, 그는 늘 간절했다. 웬만한 여행자 하루 숙박비면 결핵이나 폐렴으로 입원한 어린이 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안은 첼로처럼 후덕한 체구의 인상 좋은 그, 비토첼로가 캄보디아 어린이들의 구원자로 불리던 스위스 의사 비트 리히너(Beat Richner)였다. 그는 캄보디아 내전 직후인 92년 수도 프놈펜에 무료 아동병원 칸타보파 제1병원(Kantha BophaⅠ)을 연 이래 씨엠레아프의 자야바르만까지 총 5개 아동ㆍ산모 병원을 개설해 운영하며 지금까지 25년여 간 약 1,700만 명을 진료하고 중환자 170만 명을 입원 치료했다. 병원을 늘리고, 의료기구를 장만하고, 의사 등 직원 2,500여 명의 급여를 마련하는 모든 책임이 그의 것이었다. 그는 병원 운영을 동료에게 맡긴 채 고국 스위스의 여러 도시를 첼로를 메고 다니며 모금연주회를 열곤 했고, 스위스와 캄보디아 정부 당국자들의 지원을 부탁하러 다녔고, 그의 “지속 불가능한” 의료봉사 모델을 비판하는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기구와 글로벌 NGO등에 맞서 싸웠다. 스스로 지은 예명 ‘비토첼로’로 더 알려진 비트 리히너가 9월 9일 별세했다. 향년 71세.

캄보디아 현대사는 1991년 파리평화협정 전과 후로 나뉜다. 프랑스 식민지로 지내다 1954년 독립했지만 이내 인도차이나-베트남전쟁에 휩쓸렸고, 크메르루주 집권기(1975~79)의 폭압 이후에도 약 10년간 베트남 등이 개입한 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 끝이 파리평화협정이었고, 1년여의 과도기를 거쳐 망명 국왕 노르돔 시아누크와 훈센 총리체제의 입헌군주정이 시작됐다. 농업사회주의를 표방한 크메르루주 정권은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차를 표적삼아 탄압, 지식인과 의사 등 전문인 다수가 학살 당하고 수용소에서 기아ㆍ질병으로 숨졌다. 독립 이후 어렵사리 구축해온 사회ㆍ의료 시스템이 사실상 와해된 거였다. 리히너가 자신이 운영하던 취리히의 병원을 동료에게 넘기고 프놈펜으로 건너간 게 1991년 그 해였다.

평화협상이 진행 중이던 91년, 프랑스 파리의 한 모임에서 시아누크가 즉흥적으로 건넨제안이었다고 한다. 칸타보파병원은 시아누크가 52년 숨진 4살 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국립 아동병원이었고, 리히너는 신참 의사였던 74~75년 스위스 적십자 의료봉사단의 일원으로 거기서 일한 인연이 있었다. 크메르루주 집권으로 중도에 되돌아온 게 안타까웠던 그는 즉석에서 시아누크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출국하는 날까지 스스로도 불안했다고 훗날에야 인터뷰에서 말했다. 국왕은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였고, 신생 내각은 가난했다. 병원은 거의 폐허상태였다. 의료진도 장비도 새로 구해야 했고, 건물도 수리해야 했다. 그 난관을 그는 돈키호테 같은 낭만적 기질과 용기로, 스위스 시민들의 후원으로 돌파해나갔다.

스위스 주간지 ‘슈바이처 일러스트리에르테(Schweizer Illustriete)’의 편집장이던 페테르 로덴뷜러(Peter Rothenbuhler)는 ‘첼로를 든 소아과의사’로 꽤 알려졌던 그가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돌보러 떠난다는 소식을 전하며 독자 상대 모금을 시작했다. 다들 불가능하리라 말했지만 그는 “취리히에만 해도 손 벌릴 수 있는 은행가와 백만장자가 충분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기부금은 대부분 평범한 시민들이 냈다. 그렇게 모은 종자돈 5만 스위스프랑과 가방 두 개, 첼로와 바이올린을 메고 출국했다. 초창기부터 그를 도우며 칸타보파의 ‘영원한 넘버 2’를 자임했던 동료 의사 페테르 스투데르(Peter Studer)는 “돈도 없었지만 물자도 없어, 벽돌 하나 수도꼭지 하나까지 외국서 수입해야 했고, 침상도 주워와 고쳐 쓴 게 여러 개였다”고 말했다. 60개 침상의 첫 병원은 92년 11월 개원했다.

칸타보파병원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진료ㆍ입원비가 전액 무료였고, 의사는 물론이고 수위도 뇌물을 받지 않는 병원이었다. 캄보디아는 지금도 국제투명성기구 부패인식지수(CPI) 최하위(2017년 175개국 중 161위)지만, 당시는 더 심했을 것이다. 경찰 학교 법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병원서도 급행료를 내야 했다고 한다. 2002년 인터뷰에서 리히너는 “교통사고 응급환자여도 100달러쯤 지니고 있지 않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먼저 병원에 들어서려면 경비에게 50달러쯤 뇌물을 줘야 하고, 병원 관계자에게 또 돈을 내야 한다.” 그는 “시엠레아프 병원 환자 가족의 95%, 프놈펜 병원의 약 85%가 병원비로 1달러도 낼 형편이 안 되는 이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아이가 아프면 먼저 바이크를 팔고, 소를 팔고, 결국 땅을 팔아야 하는 이들이다. 무료진료를 못 받으면 가계가 아예 파산할 수밖에 없다.”(nationalradioworld.com)

2015년 10월 프놈펜의 칸타보파 제5병원 앞, 진료 시작 시간을 기다리는 어린이 환자와 보호자들. 칸타보파 병원 앞은 먼 지방에서 올라오는 이들의 차량 행렬로 교통경찰이 상주한다고 한다. 유튜브, beat-richner.ch

리히너는 의사부터 병원 미화원까지 자신을 뺀 전 직원의 급여를 ‘현실화’했다. 2002년 기준 월 생활비 260달러가 드는 프놈펜의 공공의 월급이 20달러였다. 그러니 부업을 해야 했고, 뇌물을 받아야 했고, 약품을 빼돌려 팔아야 했다고 한다. 그는 칸타보파의 미화원에게 초임 200달러, 간호사에게 200~300달러, 의사에겐 600~700달러를 지급한다고 밝혔다. 대신 일체의 뇌물과 비리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성공의 관건”이라며 그 전제가 ‘합당한 급여’라고 말했다. 그의 방식을 캄보디아 정부 관련 공무원이나 의료계가 곱게 봤을 리 없다. WHO도 예외가 아니었다. 의료봉사도 빈곤국 경제현실에 보조를 맞춰 전개해야 한다는 게 WHO 활동 및 지원의 원칙이다. 리히너가 2000년대 초 고가의 CT(컴퓨터단층촬영) 장비를 구입하자 WHO와 유니세프가 거칠게 비판했다고 한다. 더 급한 기초 보건ㆍ위생 수요도 많은데 무슨 낭비냐는 거였다. 리히너의 기준은 단순했다. 결핵을 진단하려면 CT장비가 필수적이고, 스위스 아이들이 CT진단을 받는다면 캄보디아 아이들도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거였다. 캄보디아는 결핵 유병률이 65%에 달하는 국가로 악명 높고, 오염된 혈액 수혈로 하루 평균 30명의 아이들이 HIV에 감염되고 24명이 간염에 걸린다. 그의 병원들은 한 해 100만여 달러를 들여 헌혈 받은 혈액을 검사한다. 그의 원칙은 ‘One Child, One Life’, 즉 가난한 나라의 아이 목숨도 똑 같은 목숨이라는 거였다.(NYT).

리히너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계를 누비며 보건 컨설팅과 자문 등을 업으로 삼는 국제기구 전문가들이 있다. 그들은 세엠레아프의 방값 340달러짜리 5성호텔에서 잔 뒤 우리 병원에 와서는 ‘현지 실정을 무시한 채 고가 장비로 고급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판하곤 한다. 여기 환자들의 평균 입원 기간은 5.5일이고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 우리가 들이는 총 비용은 평균 240달러다. 하루 숙박비 340달러를 쓴 전문가가 보기엔 캄보디아에서 목숨값 240달러는 비싸다는 것이다. 경제현실을 따지자면 대다수 캄보디아 어린이의 목숨값은 제로다.”(ft.com) WHO 등은 그가 ‘롤스로이스 의료 Rolls-Royce Medicine’를 고집한다고 비난했고(zeit-fragen.ch), 리히너는 치명적인 전염성 질병에 손 씻기만 독려하는 WHO의 프로토콜을 ‘소극적 제노사이드(Passive Genocide’라고 퍼부으며, 사실을 과장한 말이지만, WHO 한 해 예산이면 그의 병원 같은 걸 세계 200곳에 설립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NYT)

청년의사 시절부터 '비토첼로'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아마추어 첼리스트 리히너는 첼로 연주로 캄보디아와 스위스 등지에서 병원 운영비 모금행사를 열곤 했다. 독신인 그는 첼로를 반려자처럼 아꼈고, 첼로를 안고 있을 때가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2007년의 그. 위키피디아

그의 병원은 96년 시아누크가 기증한 왕궁 부지에 칸타보파 제2병원을 설립한 이래 2007년의 제5병원까지 총 5개 3,000여 병상 규모의 체인으로 커졌다. 1999년부터 인턴-레지던트 과정 교육센터를 운영해왔고, 2001년 모자보건센터를 설립했다. 2016년 한해 15만5,000여 명이 입원했고, 84만8,000여 명이 외래진료를 받았고, 2만4,000여 건의 수술을 진행했고, 2만3,000여 명의 신생아 출산을 도왔다. 저 숫자는 전년비 8~13%P 늘어난 실적이었다.(beat-richner.ch) 그건 그가 모금해야 할 돈이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92년 이래 2016년 말까지 그의 병원재단은 미화 5억6,0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캄보디아 정부가 3.2%를 댔고, 스위스 연방정부가 4.3%를 댔다. 92.5%는 스위스 시민들의 개인 기부였다. 그의 병원들은 2017년 한해 4,350만 달러를 썼다. 예산의 95%는 약값과 인건비 등 병원 운영비였고, 기금모금 경비 등 재단 운영에 쓰인 돈은 총 예산의 5%였다. 다시 말해 시민들의 후원금은 전액 환자들을 위해 썼다. 2000년 스위스정부는 칸타보파병원 그룹을 감사, 비용-실적에 근거해 제3세계 의료복지의 모범이라 평가했다. 외국인 16명과 현지인 68명으로 출범한 그의 병원그룹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 단 두 명과 현지인 2,500여명으로 구성된, 명실상부 캄보디아의 병원으로 변신했다.

2017년 3월, 리히너를 이어 병원 운영 총괄 후임이 된 카이 산티(Ky Santy) 박사는 “리히너에겐 병원과 첼로 연주 외 사생활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22년 된 승용차로 출퇴근하며 휴가 없이 하루 12시간씩 일했고, 사무실도 따로 없어 병원 식당에 상주하며 주요 병원 업무와 회의를 주재하곤 했다고 한다. 독신인 그는 식사도 모두 병원에서 해결했다. 아침 메뉴는 늘 삶은 달걀 두 개와 커피 한 잔이었다.

비트 리히너는 1943년 3월 13일 취리히에서 태어났고, 73년 의사가 돼 취리히아동병원에서 1년 근무했다. 74년 캅보디아 봉사활동을 갔다가 이듬해 4월 귀국, 취리히아동병원에 복귀했다가 친구(Fredi Loehrer)와 함께 병원을 개업했고, ‘비토첼로’라는 예명으로 수준급 첼로 연주 실력을 뽐내곤 했다. 청년시절 한 차례 결혼을 했지만 3개월 만에 이혼했고, 그 뒤론 독신으로 지냈다. 새벽 5시면 일어나 이메일과 고국 뉴스와 날씨를 확인하곤 했는데, 날씨가 안 좋으면 덜 억울해서 조금 기분이 풀린다고, 이따금 향수병을 느낀다고도 말했다. 페더러의 경기는 빠짐없이 보는 테니스 팬이었고, 말년까지 소형 엽궐련을 즐겼고, 잠들기 전 와인 한 두 잔을 마시곤 했다. 운동은 “위험해서” 일절 안 했다. 그는 농담을 즐겼지만, 보이는 것처럼 사교적인 편은 아니어서, 혼자 첼로를 연습하는 30~40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했다.(schweizer-illustrierte.ch)

칸타보파 병원이 자랑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니라고, 재정자립 문제를 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 문제를 푸는 데 몰두했다. 2013년 이후 캄보디아 정부의 지원 예산이 점차 늘어났다. 훈센 수상 부인이 의장인 캄보디아 적십자사도 연간 100만 달러를 지원하고, 수상의 딸이 의장인 바얀(Bayan)재단도 연 150만 달러를 대고 있다. 결연병원인 취리히아동병원도 도움을 주고 있고, 그를 인연 삼아 캄보디아로 여행 오는 스위스인들도 꽤 늘었다. 근년에는 병원 총 예산의 1/3이 캄보디아에서 충당된다. 그렇다곤 해도, 그의 명성과 카리스마가 사라진 칸타보파의 내일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그는 91년으로 되돌아간다면 국왕의 제안을 거절할지 모른다고, 취리히 호반의 안락한 집에 살면서 성공한 의사로 가끔 첼로 콘서트나 열며 살았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건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스투데르는 “한번 생각해봐라. 그는 하루 평균 12만 프랑을 모금해야 했다”고 말했다. 리히너는 “입원한 아이들을 안고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다.(…) 그건 저질스럽고(kitsch), 무례한 짓이다. 그들을 돕는다는 발상 자체가 무례다”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는 모금을 위해 그런 사진들을 찍어야 했다. 기억을 잃어가는 퇴행성 뇌질환을 얻은 그는 2017년 3월 스위스로 귀국해 치료를 받았다.

그의 별세 소식에 병원 전 직원은 묵념으로 애도했고, 삶은 계란 두 개와 커피 한 잔을 놓은 빈소를 마련했다. 일주일 애도기간을 선포했던 캄보디아 정부는 조문객이 쇄도하자 기간을 100일로 늘렸다. 스투데르는 “그가 바란 건 아픈 아이들을 돌보는 일 뿐이었다”고, “(나는 슬프지만), 그에게 죽음은 어쩌면 구원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늘 “캄보디아는 내가 살 곳이 아니고, 결코 그걸 바란 적도 없다. 재정문제만 해결되면 홀가분하게 스위스로 돌아갈 것”이라던 그였지만 죽어서는 캄보디아에 묻히길 원했다. 스투데르는 “병원 한 켠에 비트가 즐겨 머물곤 하던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말했다. 이제 그의 공연은 볼 수 없지만, 그의 나무를 보러 가는 이들은 있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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