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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식칼럼] 박용진 의원의 ‘1cm’ 나아가기

입력
2018.10.25 16:46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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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유치원 반발 불구 비리 백태 첫 고발

한유총 반격에도 “변화 이끄는 게 정치”

기득권 깨는 용기에 정치권 힘 모아줘야

당정청이 25일 유치원 공공성 강화 방안을 발표한 직후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정책위의장(왼쪽부터),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박용진 의원, 조승래 교육위 간사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당정청이 25일 유치원 공공성 강화 방안을 발표한 직후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정책위의장(왼쪽부터),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박용진 의원, 조승래 교육위 간사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19대 대선이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해 4월 말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가 주최한 ‘사립유치원 교육자대회’에 참석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표가 된다”는 주변의 말만 믿고 “국공립 단설유치원 신설을 억제하겠다”고 공약해 유아를 둔 부모들의 거센 반발을 낳고 내내 ‘한유총-안철수 빅딜설’에 시달렸다. 평소 신중한 안 후보가 누구에게서 어떤 얘기를 듣고 그런 섣부른 공약을 내놨는지 지금도 수수께끼지만, 당시 한유총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1995년 설립된 한유총은 전국 4,200여개 사립유치원의 70%가 속한 거대 이익단체다. 2002년 정부가 공립 유치원 확대 방침을 밝히자 ‘사립유치원 죽이기’라며 반대운동을 펼치면서 세력화됐고, 이후 회계투명성 강화나 유아보육정책 개선 등의 방안이 나올 때마다 로비나 실력행사를 일삼으며 권력화한 집단이다. 부모를 볼모로 삼고 표를 무기로 정치권을 압박하니 진보ㆍ보수 가릴 것 없이 교육당국은 물론 국회도 함부로 손을 못 대는 치외법권 지대였다 .

그러니 교육청 감사에서 누리과정(3~5세) 예산지원금을 명품 구입 등에 쌈짓돈처럼 유용한 것으로 밝혀진 사립유치원 1,875곳의 비리사례 5,951건을 공개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그의 말대로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로 비치는 게 당연하다. 한유총이 비대위를 꾸려 사과하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이후 내놓은 ‘사립유치원, 교육공무원보다 깨끗해’라는 입장문이나 명예훼손 민ㆍ형사 소송 운운하는 행태를 보면 “눈 다 내리고 난 후에 두고 보자”는 적개심마저 느껴진다. 정부의 유치원 비리 대책 발표가 임박하자 집단휴업 카드를 내밀고, 일부 유치원은 노골적으로 원아모집 중단과 폐업까지 거론하니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툭하면 사유재산 운운하고 장사꾼 논리로 교육의 공공성을 후려치는 행태는 놀랄 일도 아니다.

이런 막무가내 집단의 표적이 됐으니 박 의원의 마음 한 구석엔 지금쯤 후회가 움틀 법도 하다. 국정감사에 앞서 지난 5일 개최하려던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토론회’가 한유총 회원들의 점거 난동으로 무산됐을 때 그들의 힘과 실명공개의 파장을 알아채고 진작에 물러서지 못한 자신의 무모함에 화를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우리가 뽑은 시도교육감, 그 많은 진보교육감은 다 뭘하고 있었는지….이름만 진보면 다인가, 하는 일이 진보여야지”라는 말도 원망보다 자책으로 들린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다. 여느 이익단체와 달리 거센 역풍이 부는데도 굴하지 않고 되레고개를 더 빳빳이 드는 한유총이 지금 어떤 칼을 갈고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나마 학부모들의 분노에 놀란 정부와 여당이 박 의원의 지원군으로 나서 유치원 비리 근절 대책을 내놓는 등 부산을 떨지만, 이 바람이 잦아들고 한유총의 반격이 시작되면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모른다. 공공기관 채용비리를 물고늘어지는 자유한국당 등 야당이 강 건너 불 보듯 이 문제에 입을 닫는 것도 박 의원에게 닥쳐올 시련을 예고한다.

박 의원은 엊그제 약속대로 유아교육법 개정안 유치원 비리 근절 3법을 발의했다. 2005년 ‘삼성 떡값’ 검사를 폭로한 후폭풍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노회찬 의원을 생각하며 정무위 시절 이건희 삼성회장 차명계좌를 파고든 결기도 되새겼다. “결국 나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각오가 없었다면 시작도 안 했다. 1cm라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도록 밀고나가는 일, 그것이 정치가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란다.

그렇다면 정치권이 할 일도 자명하다. 정파의 틀을 벗어나 “표를 가진 권력형 이익집단은 함부로 건드리는 게 아니다”는 통념을 거부한 동료가 광야에서 외롭게 싸우지 않도록 힘을 보태는 일 말이다. 비단 한유총뿐이겠는가. 우리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지만 도처에 이익단체와 기득권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 벽을 깨는 시작은 1cm다. 그래서 우리의 질문은 늘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할 생각이 있느냐”가 돼야 한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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