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서울 사립대 4곳 이공계 실험실 가보니…
21일 서울 A 대학의 화학 실험실. 가열교반기와 전류측정기, 라벨링 되지 않은 각종 시약통이 실험대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동일한 실험실의 다른 모습. 염산, 황산 등 강산성 시약이 튀거나 흐르면서 저울의 몸체는 물론 겹겹이 싼 알루미늄 호일까지 심하게 부식돼 있다. 시약장에 넣어 보관해야 할 염산이 각종 시약통, 휴지 등과 함께 어지럽게 널려 있어 위험한 화학 반응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D 대학 실험실에 놓인 교반기 몸체가 심하게 부식되고 찌그러져 있다.
A 대학 실험실의 가열교반기 위에 비커가 올려져 있다. 반응 중인 용액에 비닐을 덮어 둘 경우 화재의 우려가 있다.

21일 서울 A 대학교의 화학 실험실은 폭격을 맞은 듯 어수선했다. 심하게 부식된 저울과 가열교반기(열을 가하며 흔들어 용액을 섞어 주는 기구) 주변에 염산이 병째 놓여 있고, 비커와 뚜껑 열린 시약통, 스포이트, 휴지, 비닐 등이 뒤섞여 나뒹굴었다. 실험실 출입문은 경비시스템이 해제된 상태로 잠금장치마저 풀려 있었다.

이동헌 전북대 화학과 교수는 “사진상으로 볼 때 플라스크나 유리병에 라벨링이 거의 안 되어 있고 염산 등 시약병 주위에 너무 많은 물건이 어지러이 놓여 있어 위험한 반응이 일어날 수 있어 보인다”라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모 대학 화학과 교수는 “시약들 간의 교차 오염으로 인한 폭발 위험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문제는 다른 대학 실험실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상태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일보 ‘View&(뷰엔)’팀이 서울 지역 4개 사립대학교의 이공계 실험실을 직접 찾아 실태를 확인해 보니 작동이 불량한 실험 장비를 그대로 쓰거나 유해 화학약품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등 다양한 문제점이 발견됐다. 실제 실험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경험담 속에서는 상식을 뛰어넘는 황당한 상황도 흔했다.

#엉터리 실험 양산하는 불량 장비

낡고 부실한 기자재, 그마저도 부족한 상황에서 실험이 제대로 될 수 있을까.

시료의 무게를 100분의 1g 단위까지 측정할 수 있게 만든 저울이 노후돼 영점을 잡지 못하거나 강산성 시약이 튀면서 기판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부식된 가열교반기도 적지 않았다. B 대학 4학년 김모(26)씨는 “일반화학실험 때 저울의 영점이 잡히지 않아 시약의 무게를 우리끼리 임의로 정한 적도 있다”라고 말했다.

24년 된 광학현미경 여러 대가 비치된 B 대학 실험실에서는 ‘불량’ 표시된 현미경도 눈에 띄었는데, 이 학교 생명과학부 3학년 오모(22)씨는 “일반생물학 실험을 하는데 현미경 7대 중 6대가 고장이어서 25명이 현미경 1대를 돌려가며 썼다”라고 전했다.

A 대학 물리학과 3학년 김모(23)씨는 “재작년 물리학 실험에서 오차율이 1만2,000%가 나와 황당했다. 재실험도 쉽지 않다 보니 결국 실험 결과를 조작하는 법을 더 먼저 배우게 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B 대학 실험실에 비치된 광학현미경 상자에 ‘불량’ 표시가 되어 있다.
사용 중인 다른 광학현미경의 구입일이 1994년으로 표시돼 있다.
A 대학 실험실에서 사용 중인 분석저울. 외부 영향이 차단된 채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지만 저울의 무게 값은 쉴 새 없이 변했다.
B 대학 실험실에 설치된 인화성 물질 보관함. 잠금장치가 풀려 있어 누구나 문을 열 수 있다.
C 대학의 경우 각종 화학약품이 든 시약장을 잠금장치 없이 복도에 두었다.

#안전 위협하는 부실한 관리

뷰엔팀이 살펴본 대학 실험실의 15% 정도가 출입문이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중금속 등 폐 약품통이 뚜껑이 열린 채 방치되거나 인화성 약품 보관함도 손잡이만 당기면 열릴 만큼 허술했다. 인체에 치명적인 유독성 약품의 경우 테러 등에 악용될 소지가 있어 실험실, 준비실 보관함의 잠금장치는 필수다. C 대학의 경우 각종 화학약품이 담긴 보관함이 잠금장치도 없이 화장실 앞 복도에 놓여 있기도 했다.

D 대학의 실험실에 설치된 전원 콘센트는 먼지가 쌓여 있어 스파크로 인한 발화 가능성이 우려됐다. 이 학교 화학생명공학부 대학원을 졸업한 김모(26)씨는 “얼마 전 설비에 불이 붙었다고 들었다. 콘센트에 항상 먼지가 쌓여 있어서 ‘저러다 불나겠다’ 싶었는데 누군지 운 나쁘게 걸린 것 같다”라고 말했다.

#안전 의식 부재도 문제

위험한 실험 재료를 다루는 만큼 보호구 착용이 필수지만 학생들이 전하는 실상은 ‘불감증’ 그 자체다. 실험 복장 규정도 학기 초가 지나면 느슨해져서 보안경이나 마스크를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음식물 반입도 문제시하지 않았다”라고 B 대학 이공계열 3학년 이모(22 )씨는 말했다.

같은 학교 생명과학부 3학년 오모(22)씨는 “실험실에 방열 장갑이 없어서 뜨거운 플라스크를 맨손이나 실험복 소매 끝자락으로 들었는데 떨어뜨릴까 봐 조마조마했다”라고 말했다. 대장균, 콜레라균 등 미생물을 다루는 실험과 음식문화 관련 학과의 조리 실습 수업이 시간 차를 두고 동일한 실험실에서 진행되는 경우도 있어 감염이 우려된다.

D 대학 실험실 구석에 먼지가 쌓인 채 나뒹구는 전원 콘센트. 스파크가 일 경우 화재 및 폭발사고 가능성이 있다.

#실험실습비는 어디로?

이공계열 등록금은 인문계에 비해 많게는 120만원 정도 비싸다. 실험실습비 명목으로 적지 않은 돈을 내면서도 실험 환경이 열악한 현실에 대해 B 대학 기계공학과 4학년 박모(25)씨는 “너무 부실하고 오래된 실험 기구들을 보면 실험실습비의 가치를 절대 체감할 수 없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국내 사립대의 연구 인프라(기계기구매입, 연구, 실험실습) 지출액은 9,573억원으로 2011년 1조1,164억원에 비해 14.2%가 감소했다.

임희성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대학이 등록금 동결을 핑계로 교육에 필요한 실험실습비나 기자재구입비를 늘리지 않고 공개도 하지 않는 게 문제”라며 “학생들에게 투명하게 공개함과 동시에 등록금 의존도를 낮추는 등의 노력이 절실하다”라고 말했다.

박서강 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김주영 기자 will@hankookilbo.com

김혜윤 인턴기자

A 대학 화학 실험실 보관함에 비치된 방열 장갑 한 벌과 보안경.
B 대학 실험실의 흄후드에 중금속 등 폐 화학물질 통이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다. 후드의 유리 덮개도 열려 있어 유해한 기체가 새어나올 가능성이 있다.
A대학의 화학 실험실. 각종 시약통과 실험도구, 메모지, 휴지 등이 함께 나뒹굴고 있다. 관리가 특별히 부실한 사례인 것은 분명하나 다른 대학의 실험실에서도 정도만 다를 뿐 비슷한 문제점이 다수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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