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에 형제애를 들먹이는 것이 어울리는 것일까? 지난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났을 때 교황이 형제애를 얘기했는데 이런 언급이 반갑고 고마우면서도 ‘이 시대에 형제애를 들먹이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가’ 반대로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일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저의 생각이 너무 비관적이기 때문인가’ 하는 등의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이 우리 시대에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상관없이 앞서 얘기한 대로 저에게는 너무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것은 “남북한의 지도자들이 형제애를 기반으로 화해와 평화 정책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 나가도록 전 세계와 기도하겠다”는 교황의 말대로 형제애야말로 우리의 남과 북이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어 가는데 꼭 필요한 이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표현이 어색할 정도가 되어버린 우리 사회,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고 중요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기원합니다. 예수께서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존경받으려는 그런 세상의 권력자들과 달리 너희는 아비나 스승 소리를 들으려 하지 말고 서로 형제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왜냐면 아비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한 분뿐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이것을 800년 전 지금 교황이 그 이름을 쓰고 있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다시 살려냈는데, 그는 자신이 세운 수도회를 형제애를 사는 형제들의 집단이라는 뜻에서 ‘작은 형제회’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 형제애는 인간뿐 아니라 해, 달, 별, 공기, 바람, 늑대와 구더기까지 모든 피조물을 형제라고 하는 것에 이르렀지요. 이렇게 생각한 프란치스코는 당시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적으로 규정하며 십자군을 일으켰을 때도 그 홀로 이슬람을 형제라고 부르며 한창 십자군과 전쟁 중인 이슬람 왕을 찾아가 대화를 나눴고, 이런 프란치스코에 감동한 이슬람 왕은 프란치스코를 융숭히 대접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나라를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는 통행권도 주었으며, 프란치스코는 그들에게서 많은 좋은 것을 배워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십자군 전쟁으로 이런 고귀한 정신은 묻혀버렸다가 프랑스 혁명 때 다시 살아납니다. 저희 가톨릭교회로 보면 부끄럽기도 한 것인데 교회가 잊은 가치를 혁명의 시민들이 되살린 것입니다. 우리로 치면 한국 천주교회가 못 한 것을 촛불혁명이 해낸 것과 같은 거지요. 프랑스 혁명이 내건 기치가 우리에게는 ‘자유, 평등, 박애’로 알려져 있지만 박애가 사실은 형제애입니다. 라틴말로 Fraternitas, 영어로는 Fraternity를 형제애라고 번역하지 않고 박애라고 번역한 것인데 온 세상 모든 존재는 위아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라는, 이런 형제성을 바탕으로 사랑을 하는 사랑을 형제애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지금 이런 형제애를 역설하고 있지만 실은 부끄러운 기억이 있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던 봄날, 서울 성곽 길을 걸으며 아름다움에 도취해 있었는데 문득 ‘이거 일본 놈의 꽃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벚꽃을 적으로, 악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벚꽃이 일본 사람의 꽃입니까? 그리고 벚꽃을 국화로 삼은 일본에 대항하여 원산지가 제주도라고 우리가 아무리 주장한다 한들 그것이 어찌 우리의 꽃이겠습니까?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벚꽃은 벚꽃일 뿐이며 일본 사람도 우리의 형제, 벚꽃도 우리의 형제인데 형제애를 살겠다고 한 저도 한 순간 형제애를 놓치고 적대감에 휘말렸던 거지요. 부모를 생각지 않고 부모의 유산만 탐하면 형제끼리 남남이 되고 원수가 되는 이치를 형제애의 가치로 극복해야 함을 이 중요한 때에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김찬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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