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탕누어 ‘역사, 눈 앞의 현실’

영화 '공자: 춘추전국시대'의 한 장면. 열국이 무력으로 싸우는 틈바구니에서 정나라의 자산은 나라를 어떻게 유지했는가. 탕누어는 현대 중국이 대국임을 내세울 게 아니라 그 시절의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국(小國)은 어떤 나라일까. 다들 인구, 땅, 군사력, 경제력 같은 걸 떠올리지만, 사실 가장 큰 요인은 ‘길목’이다. 하필이면 주변 강국들이 길항하는 길목에 놓여 있다는 것, 비애감이 극대화되는 소국의 조건이다. 그게 아니라면야 소국인들 어떠리. 조용히 살면 그 뿐인데.

경계에 서있다는 이유로 중국, 프랑스, 일본, 미국 등 패권국과 끝없이 싸워야 할 처지에 내몰렸음에도 베트남의 호찌민은 전쟁보다 협상을 선호했다. 싸우길 피하려는 듯한 태도 때문에 입만 용감한 이들에게서 친중파, 친불파, 친미파, 친일파가 아니냐는 의심을 번갈아 받았다. 의심에 대한 호찌민의 응답 ‘이불변 응만변(以不變 應萬變ㆍ불변의 마음으로 만변의 세상에 대응한다)’은, 그래서 멋지기보다 좀 애잔한 표현이다.

대국임을 내세워온 중국의 역사에서 이런 ‘소국의 애잔함’을 끄집어냈다는 점 만으로도 ’역사, 눈 앞의 현실’은 일단 집어들 만하다. 저자는 좌구명의 책으로 알려진 ‘춘추좌전’을 다루되, 회맹으로 전국을 장악한 ‘춘추오패(春秋五覇)’ 대신 약소국 정나라의 재상 자산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첫 패자라는 제환공의 관중 같은 인물이야 유명하지만, 정나라의 자산이라면 낯설다. 소국에다 망해버렸으니 그렇다. 하지만 약소국으로서 언제 무릎을 꿇어야 할지, 언제 반항할지 정확하게 계산한 뒤 행동에 옮긴 이가 자산이다. 성문법을 만들고 법치를 내세운 자산을, 역시 약소국 노나라 출신이었던 공자는 높이 평가했다.

역사, 눈앞의 현실
탕누어 지음ㆍ김영문 옮김
378 발행ㆍ600쪽ㆍ3만원

저자가 자산을 끄집어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난감한 역사(청나라 말기)를 설명할 때 학자들은 흔히 중국이 5000년 동안 늙고 부패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2000년 동안 지속된 중국의 ‘유년 상태’가 야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분열을 예외로, 통일을 영구적인 것으로 가정한 중국의 강대국 놀음이란 유치한 것이며, 그 좋은 예가 자산의 존재였다는 얘기다. 대국 중국을 맞상대해야 할 대만 지식인인 저자의 자의식이 투영됐겠지만, 중국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도 비슷하게 느끼는 바가 있어 절로 공감이 인다.

사실 자산에 대한 얘기가 이렇게 두껍게 나올 만한가 싶지만, 저자는 동양의 여러 학자들뿐 아니라 밀란 쿤데라, 움베르토 에코 같은 서양 작가들까지 불러내면서 엄청나게 두터운 수다를 풀어나간다. 풍성한 말 잔치다. 잔치는 일정 부분 낭비이기도 하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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