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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증거 없애느라 택시비만 못 받게 돼” 주 52시간 꼼수 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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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증거 없애느라 택시비만 못 받게 돼” 주 52시간 꼼수 백태

입력
2018.10.22 04:40
수정
2018.10.22 11:1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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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은 똑같이 하는데 심야 택시비만 못 받게 됐죠.”

국내 섬유제조업체에서 일하는 한모(33)씨는 주 52시간제가 실시된 뒤 회사로부터 “심야 택시비를 청구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주 52시간제 실시에도 업무량은 줄지 않아 공식적인 퇴근시간(오후 6시) 이후로도 회사에 남아 야근하는 경우가 많지만, 심야 택시비 청구 기록 자체가 공식 퇴근 기록에 반하는 야근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한씨는 “실제 야근을 없앨 생각은 하지 않고 야근 흔적만 없애고 있다”고 씁쓸해했다.

초과근무 근거를 없애기 위한 시도는 심야 택시비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내 대형 제약회사 대부분이 영업사원들이 거래처에 방문할 때 기록을 남기는 ‘콜’ 시스템을 최근 폐지했다. 지금껏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은 위치기반서비스를 바탕으로 스마트 전자기기를 이용해 어느 거래처에 방문했는지 실시간 기록을 남겨야 했다. 영업사원 입장에서 과도한 노동 감시 시스템이 사라진 것은 반길만한 일. 하지만 지난 7월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폐지됐다는 점이 논란을 낳았다. 업계 관계자는 “제약회사 영업사원은 하루에 거래처 여러 군데를 방문하는 건 물론 거래처와 저녁 술자리에도 자주 참석해야 해 주 52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가 많다”며 “콜 시스템을 없앤 것은 근무시간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한 회사측 조치로 보는 시선이 많다”고 했다.

주 52시간 근로제가 도입된 지 3개월 반, 법 위반을 피하려는 기업의 각종 꼼수가 범람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업무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연장근로를 하다 보니 공식 야근이 돈도 못 받고 노동하는 비공식 야근이 됐을 뿐이라는 직장인 푸념이 적지 않다.

국내 대형 회계법인에서 일하는 A씨는 주 52시간을 초과해 일하더라도 사실대로 근무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 이곳은 직원이 직접 회사 인트라넷(내부망)에 하루 근무시간을 입력하는 식이라 52시간에 가까워지면 본부장에게 이메일이 가고, 본부장은 52시간 초과 근무에 대해 해당 직원의 상사에게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직원이 ‘눈치껏’ 52시간 이하로 근무시간을 줄여 입력할 수밖에 없다. A씨는 “(52시간 근무제) 시행 초기에는 눈치 없이 52시간 이상을 정직하게 입력하는 직원들이 있었는데, 회사 내에 부정적으로 소문이 났다”라며 “이제는 본부장에게 메일이 갈까 봐 실제보다 적게 근무시간을 기록해 공식기록 상으로는 52시간을 넘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52시간 이하 근무를 보장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야근을 조장하기도 한다. 한 의류브랜드에서 근무하는 김모(28)씨는 목요일마다 팀장과 미팅을 갖고 잔여 근무시간을 계산한다. 목요일까지 근무한 시간에 맞춰 금요일 근무시간을 결정해 주 52시간을 넘기지 않도록 마련된 장치다. 하지만 반대로 목요일까지 근무한 시간이 적다면, 52시간을 채우기 위해 금요일 야근을 감수해야 한다. 김씨는 “어느 주에 운 좋게 월, 화, 수, 목 모두 일찍 퇴근해 근무시간이 많이 남았더니 위에서는 금요일 야근을 당연하게 여기더라”고 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제도 취지에 역행하는 일부 기업의 편법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당사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직접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우선”이라면서도 “제도 정착시기인 만큼 정부의 적극적인 근로감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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