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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된 前농림부 장관 “농사 쉽지 않아…작년 300만원 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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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된 前농림부 장관 “농사 쉽지 않아…작년 300만원 벌어”

입력
2018.10.19 16:54
수정
2018.10.20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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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농부다] <6>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대추를 수확하고 있다. 이동필 제공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대추를 수확하고 있다. 이동필 제공

 ※편집자 주: "10~20년 후 농민이 스포츠카 타는 시대가 올 것" 세계적인 투자가 짐 로저스가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해 한 말이다.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농사짓는 기자’가 대한민국의 ‘촉망받는 농업 CEO’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인기척이 들리자 황토집 문을 열고 생활한복 차림의 ‘시골 촌부’가 고무신을 신고 반갑게 걸어 나왔다. 악수를 청한 손을 맞잡으니 굳은살과 갈라진 손끝에서 농사의 고단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장관 퇴임 바로 다음 날인 2016년 9월 6일. 이동필(63)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고향 경북 의성군으로 귀농했다. 역대 농림부 장관 중 가장 오랜 3년 6개월간의 재임 기간을 뒤로하고 농부의 삶을 선택한 지 이제 꼭 2년째다.

이동필 전 장관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40여 년 전 지었다는 집 마당에는 ‘애일당(어머니와 지내는 하루가 사랑스럽다는 뜻)’이란 정자와 사랑채인 ‘사원제(음수사원에서 따온 말로 어려울 때 맺은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각오를 담았다)’가 자리했다.

인터뷰는 ‘애일당’에서 함께 막걸릿잔을 기울이며 자연스레 시작됐지만, 이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 관료라는 책임감에 말을 아꼈다. 인터뷰하는 일도, 여기저기서 무엇을 맡아달라는 요청도 대게 거절한다. 오해를 받기 싫다는 게 그 이유다. 인터뷰 중에도 누군가 함께 일해보자며 전화를 걸어 왔지만 그는 정중히 제의를 뿌리쳤다.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모시며 고향 창생의 길을 생각해보자는 마음이 혹여 의도치 않게 다른 뜻으로 비칠까 더 조심스러운 눈치다.

[저작권 한국일보] 농부가 된 이동필 전 장관의 손이 거칠다. 김태헌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농부가 된 이동필 전 장관의 손이 거칠다. 김태헌 기자

이동필 전 장관이 생활하는 ‘사원제’에서는 세상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TV나 신문을 찾아 볼 수 없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고초를 겪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라는 게 이유였다. 이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에서 관료를 지냈기에 자신도 책임이 무겁다고 말한다.

농촌경제연구원장과 장관 시절 거의 매주 현장을 찾았지만, 그때 보고 느낀 농촌과 실제 농부로 사는 지금의 농촌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공급자와 수요자, 그리고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직접 부딪치는 것은 극명한 차이로 나타냈다.

이 전 장관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농업농촌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기보다 그저 밥벌이나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았나”라고 자책했다. ‘답전보’에 비유해 후배 공직자들의 마음가짐을 가다듬어 주고 싶다고도 했다. ‘답전보’는 조선 건국 공신인 정도전이 유배지에서 벼슬아치의 잘못됨을 질타하는 농부와의 대화를 기록한 글이다.

농업인들이 생산보다 판매를 더 걱정하고 있다는 현실적 문제도 지적했다. 농사를 잘 지어 풍년이 들면 가격이 내려가 걱정, 흉년으로 농산물이 없으면 팔 것이 없으니 이래저래 걱정이라고 했다. 지역 농협이 공부하고 역량을 키워 발 벗고 나서면 이런 문제점을 상당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도 밝혔다.

특히 6차산업과 스마트팜이란 새로운 농업에 대해 농업인 자녀들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이 부족하다는 점도 이 전 장관이 2년의 농촌 생활에서 느낀 점이다.

30여 년 농촌경제연구원에서 농정을 연구하다 장관까지 지낸 그가 왜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고향 경북 의성으로 내려와 농부의 삶을 택했을까 궁금했다. 가을비 내리는 9월,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만나 ‘농부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저작권 한국일보]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애일당’에서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태헌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애일당’에서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태헌 기자

-장관 퇴임 바로 다음 날 귀농해 만 2년이 됐네요.

“햇수로 3년, 9월로 만 2년이 됐습니다. 40여 년 전 고향을 떠날 때 언젠가는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혼자 고향 집을 지키고 계시던 어머니와 함께 여생을 보내고 싶었죠. 현장으로 들어가 수요자 입장에서 내가 했던 수많은 말, 그동안의 연구와 정책이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직접 겪어보고 살아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죠. 아내도 딱 하루 고민하더니 같이 내려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날로 고향에 내려왔습니다.”

-농촌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요?

“서울은 바쁜 일상 속에서 짬짬이 문화생활도 하고 친구들과 모임을 하기도 하지만 농촌은 안 그래요. 해 뜨면 일하고 해지면 집에 들어옵니다. 저녁에는 책을 좀 봐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일이 고되 그냥 쓰러져 자는 날이 많아요. 주변에 문화생활을 할 곳도 마땅찮지만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6개월 만에 체중이 12kg이나 빠졌어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나 주 52시간은 먼 이야기죠.”

-농촌 전문가시니 농사로 수익도 많이 내셨겠어요.

“저야 돈을 위해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닙니다만, 제대로 농사를 하기 위해서는 준비를 많이 해야 해요. 마늘이나 한우 등 고소득 작목을 하거나 온실재배 같은 새로운 기술을 익히면 직장생활 못지않게 제법 큰 돈을 벌 수 있어요. 주변에도 1~2억 원씩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초기에는 기술을 익히고 농장을 마련하려면 진입장벽도 높고 공부도 많이 해야죠. 사실 도시에서 직장 다니는 것보다 자기 책임하에서 일하니 신경 쓸 일이 적어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지만 고된 농사일에 판로도, 가격도 불안정하니 늘 걱정이 많아요. 소규모 농사를 하는 나조차 이 지경인데, 그분들은 오죽하겠느냐 말입니다. 물론 부모가 영농기반을 갖춘 사람들은 비교적 쉽게 출발할 수 있지만, 객지에서 농촌에 들어와 새로이 농사를 시작한다는 건 분명 간단치 않은 일이에요.”

-대를 이어 농사를 짓지 않는다면 귀농은 힘들겠군요.

“부모와 함께 농사하는 사람들도 걱정은 있어요. 청년들은 기존 농업인 부모세대와 생각이 달라요. 그런데 부모들이 그걸 가만히 둡니까? 자녀가 하고 싶은 작물이나 농법을 부모들이 못 미더워하고,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은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해요. 지금 극장 가서 영화 볼 시간이 있느냐고 말이죠. 이렇게 마찰이 생기니 자녀들이 농사를 안 지으려 하고, 일부는 농사일이 힘들고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해서 젊은이들이 나가버리니 농촌은 점점 고령화되고 지방소멸로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올봄에는 동네 청년들과 그 부모님을 모시고 예산의 은성농원, 고창의 상하목장 등 소위 농산물 가공, 유통, 체험과 결합해 소득을 얻는 6차산업 현장을 찾아 견학하도록 주선했습니다. ‘농촌이 희망이 없는 게 아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죠. 모두 농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좋아했고 자신감도 가지고 열심히 해보겠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는 이런 선진농사체험 프로그램이나 궁금하고 어려워하는 문제에 답해 주는 맞춤형 정보를 지방자치단체에서 제공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지역사회가 학교가 되는 것이죠.”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마늘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왼쪽)과 생산한 마늘. 이동필 제공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마늘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왼쪽)과 생산한 마늘. 이동필 제공

-농촌에 오고 싶어 하는 청년들도 많은데요.

“농촌으로 청년들이 들어오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현장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어 대부분 외국인 근로자에 의존하는 실정인데,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농사를 짓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는 젊은이들이 어떻게 농사를 통해 지속해서 성장 발전하고, 지역사회의 주인으로 자리를 잡도록 할 것이냐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영농에 필요한 토지와 자본은 다 마련하기 어려운 만큼 농업회사법인이나 지역농협의 영농대행회사 등에 인턴 형태로 취업해 몇 년간 기술을 익히고 그 과정에서 정보를 얻은 후 창업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울러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들어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춰줘야 하는데 지금 농촌은 그렇지 못해요. 청년들이 미래의 지역사회를 이끌어 갈 주체로서 열심히 일하고, 어깨를 펴고 즐기도록 문화시설을 갖추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농촌의 미래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달려 있어요.

젊은이들도 농촌이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해요. 텃세도 심하고 도시와는 생활이 아주 다릅니다. 나처럼 새로 농사를 시작해서 돈을 벌기도 어려운 구조에요. 그러나 시대의 책임을 나누어 지고 농업농촌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이 된다는 것도 좋지 않아요? 당장 경제적 성공보다는 좀 길게 바라보며 농업과 농촌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귀농하길 권합니다.”

-농촌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이유가 뭘까요.

“영세한 경영 규모에 자연재해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직접 농사를 지어보니 안정적인 판로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의성 마늘이 유명하고 겨울 스포츠 컬링이 인기가 있어 ‘영미야, 영미야’ 몇 번 만 외치면 물건이 다 팔려나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요.

의성 마늘은 겨우 생산량의 15% 정도만 3개 지역농협을 통해 판매되고 나머지는 포전 매매(밭떼기 매매) 되거나 건조 후 상인들에게 판매되는데요, 규격 기준이 제각기 다르고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실정이라 좋은 가격을 받기도 어렵고 판매할 수 있는 곳도 많지 않아요.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고부가가치 기능성 식품으로 가공하거나 대규모 거래처를 확보하는 등 안정적인 판로를 개척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상인들에게 싼 가격에 넘길 수밖에 없죠. 이런 일을 직접 겪고 보니 지방자치단체와 지역농협이 해야 할 일이 정말 많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작년 수익은 얼마나 되나요?

“작년에 2,500평(8,264㎡) 농사를 지었어요. 콩, 팥 등 해서 대략 열 작목 정도를 했는데 결산을 해보니 300만 원 남짓 됩니다. 이게 순이익이 아니라 인건비, 종자비 이런 것 하나 안 뺀 순 매출이에요. 처음이기는 하지만 ‘새벽부터 밤늦도록 손가락이 뒤틀어질 정도로 일을 해서 번 돈이 이것뿐인가’ 허탈함도 들고,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농사짓는 분들의 심정을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듯 해요.

농사를 지으면서도 이걸 어디다 내다 팔아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게 농부예요. 특히 영세 소농의 경우 마땅한 판로가 없습니다. 저도 작년 팥이니 마늘이니 이런 것들을 생산해 놓고도 판로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어요. 수소문 끝에 안동장까지 팔러 가 봤지만 땀 흘린 노력에 비해 그쪽에서 주겠다는 가격은 턱없이 낮았습니다. 오죽하면 아내가 그냥 집으로 가져가자고 해 팔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기름값만 버린 셈이 됐어요.

양파는 인근의 중국집에 내다 팔았는데요. 평소에 농사짓는 사람이 가공, 유통도 해야 한다고 말을 해왔지만 직접 양파망을 들고 손님들이 있는 주방을 들락거리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해요. 사주겠다니 제가 어깨에 짊어지고 다 옮겨줬죠. 팥과 마늘은 SNS를 통해 지인들에게 판매했고요, 콩은 인근 남안동농협의 된장 공장에, 그리고 팔다 남은 작은 마늘은 깐마늘로 포장해서 안동농협 파머스마켓을 통해 팔았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할 수는 없는 건가요?

“장관 시절에도 농업농촌 문제를 해결하고자 참 많이 애를 썼습니다. 주산지별로 특화산업을 육성하고 스마트팜과 6차산업으로 경쟁력과 부가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요. 특히 팔아주는 농협을 만들기 위해 어려움을 무릅쓰고 신경분리를 마무리하고 경제사업을 활성화하려고 했지만, 아직 현장에서 체감하는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어요. 농협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정도전 선생이 쓴 ‘답전보’라는 글을 보면 벼슬아치의 겉모습만 보고도 농부는 그의 잘못을 줄줄이 꿰고 있습니다. 600여 년이 지난 지금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분들도 공직자들의 행태를 손금 보듯이 다 알고 있어요. 하기 좋은 말이나 보여주기식 이벤트가 아닌 정말 농업인들과 함께 걱정하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진정성 있게 일해야 합니다.

농업농촌은 안전한 농식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농업인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일터이자 삶터,쉼터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지자체와 지역농협이 손을 잡고 안전하고 건강한 먹거리의 생산, 6차산업과 로컬푸드, 체험관광 등 고부가가치화, 그리고 귀농ㆍ귀촌과 청년창업, 고령화 대책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실천하는 데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관상수를 심고 있는 모습. 이동필 제공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관상수를 심고 있는 모습. 이동필 제공

-올해는 어떤 작물을 심으셨습니까?

“올해부터는 일을 좀 줄이려고 콩을 심었던 밭에는 올봄 에메랄드그린이라는 관상수를 6,000그루 심었어요. 그런데 올여름이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반이 말라 죽었어요. 초보 농사꾼이라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관리했는데도 너무 뜨거워서 뿌리가 다 삶겨서 죽었다고 그래요. 부끄럽지만 이런 게 농사의 현실이지요.

논농사도 너 마지기(약 800평, 2644㎡)나 했는데요, 수확하면 양식하고 남는 것은 내다 팔 생각입니다. 가을에는 의성의 특산품인 작약을 심어볼 생각도 하고 있어요. 그동안 이것저것 재배해 봤으니 앞으로는 품목 수도 줄이고 일이 좀 쉬운 농사를 할까 합니다. 원래 고향으로 내려올 때 텃밭이나 가꿀 생각이었거든요.”

-농사보다 더 농촌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도 많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지방소멸과 농촌 활성화, 지역농협의 역할 강화, 6차 산업화와 청년 일자리 창출 등에 관심이 있습니다. 연구원 시절부터 공부해 오던 농가와 지역의 유형별 맞춤형 정책이며 지역사회지원농업(CSA), 산지 생태축산, 그리고 농촌 지역의 문화 운동과 삶의 질 향상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과제인데, 마땅한 참여방법이 생각나지 않네요. 정부가 정책을 추진할 때는 여러 가지를 검토하지만 현장에서는 늘 허점이 발견됩니다. 그 틈이 어디에 있는지, 왜 발생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오래 전부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일에 쫓기다 보니 그럴 여력이 없어요. 내년부터는 농사를 줄이고 그동안 공부했던 것과 직접 현장에서 체험한 경험을 책으로 엮어볼 작정입니다. 그리고도 틈이 나면 우리 농업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 국민들에게 이해와 협조, 사랑을 받는 농업농촌으로 거듭나고 소멸위기의 지방이 다시 활기를 되찾는 고향 창생을 하는데 미력이나 보태고 싶습니다. 글을 쓰는 농부, 평생 연구자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동필 전 장관은 책상에 앉아 생각할 때와 현장에서 보고 겪은 농촌 사이의 괴리감이 크다며 인터뷰 내내 씁쓸해했다. 전 정권 관료라는 책임감과 현재 농촌 현실이 처한 무게감이 그를 더 억눌러 위축시키고 있는 듯 보였다. 어쩌면 이 전 장관이 농촌으로 내려와 자신의 몸을 ‘혹사’하는 것도 자신이 해결하지 못했던 농촌 문제와 전 정권에 대한 ‘속죄 의식’은 아닐까.

의성=김태헌 기자 119@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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