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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심성은 자유를 좇는 유랑민”... 겨레의 기억 되짚다

입력
2018.10.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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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소설을 쓰기 싫어 일제 말 한국어 소설을 쓰곤 장독대에 숨겨뒀던 소설가 황순원. 그에게 작품 짓는 행위는 조용한 독립운동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본어 소설을 쓰기 싫어 일제 말 한국어 소설을 쓰곤 장독대에 숨겨뒀던 소설가 황순원. 그에게 작품 짓는 행위는 조용한 독립운동이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근대 이후의 사상을 이끌었던 것은 인문학이었다. 대학의 구성에도 문학과 역사학, 철학의 인문학이 앞자리에 있고, 그 가운데 문학은 가장 앞자리에 놓인다.

사상으로서의 문학은 두 가지 미덕을 갖는다. 삶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생각을 안겨주는 게 하나라면, 그 생각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게 다른 하나다. 많은 이들이 문학 작품을 읽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개인적 차원이든 집단적 차원이든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는 문학의 궁극적 목표라 할 수 있다.

지난 100년 우리 지성사에서 이러한 문학의 목표에 충실했던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 황순원이다. 황순원을 주목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황순원은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말처럼 ‘겨레의 기억’을 전승하려고 했다. 그의 단편소설들은 개항 이후부터 산업화 시대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둘째, 황순원은 한국인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탐구하려고 했다. 한국인은 보편적인 인간인 동시에 개별적인 민족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심성을 파악하는 데 황순원은 유랑민적 특성을 주목함으로써 한국인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선사했다.

 ◇지식인의 정신적 광휘 

황순원은 1915년 평남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학교,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공부했고, 일본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한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 소설 창작에 주력했다. 광복이 되자 1946년 월남했고,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그가 발표한 작품들은 문학과지성사에서 1985년 ‘황순원전집’ 전12권으로 완간됐으며, 2000년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황순원을 거의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국민 단편소설’이라 할 수 있는 ‘소나기’ 등 그의 작품들이 교과서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등 장편소설들이 꼽힌다.

황순원의 장편소설들은 다양한 제제들을 다룬다. ‘카인의 후예’는 북한의 토지개혁을,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한국전쟁이 남긴 상처를 주목한다. 그리고 ‘일월’은 백정을 통해 소수자 문제와 존재의 고뇌를, ‘움직이는 성’은 한국인의 심성구조를 탐구한다.

장편소설 못지않게 황순원의 문학 세계가 잘 드러난 것은 단편소설이다. 그가 발표한 단편들은 우리 겨레의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고, 그 속에서 살아간 이들의 삶을 격조 있게 그리고 있다.

황순원의 단편집 가운데 특히 내 시선을 끈 것은 ‘기러기’다. 일제 강점기 말에 쓰였음에도 ‘기러기’는 광복 직후에 발표한 세 번째 단편집 ‘목넘이마을의 개’보다도 늦은 1950년에야 출간됐다.

“그냥 되는대로 석유상자 밑에나 다락 구석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기는 했습니다. 그렇건만 이 쥐가 쏠다 오줌똥을 갈기고, 좀이 먹어들어가는 글 위에다 나는 다시 다음 글들을 적어 올려놓곤 했습니다. 그것은 내 생명이 그렇게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명멸하는 내 생명의 불씨가 그 어두운 시기에 이런 글들을 적지 아니치 못하게 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습니다.”

단편집 ‘기러기’의 서문이다. 일본어로 작품을 쓰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황순원은 이를 거부하고 ‘기러기’에 실리게 될 우리말 소설들을 써뒀다. 다수의 소설가가 친일로 전향했을 때, 그는 원고지 위에서 언어를 통한 독립운동을 조용히 전개한 셈이었다. 소중한 우리말로 겨레의 아름답고 마음 시린 이야기들을 전승함으로써 명멸하는 생명의 불씨를 지키려 했던 그의 태도는 식민지 시대에 지식인이 보여준 최고의 정신적 광휘(光輝)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랑민, 한국인의 심성 

황순원의 문학사상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움직이는 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소설은 황순원이 오랫동안 생각해온 한국인의 심성을 다룬다.

한국인이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오랫동안 토론돼 왔다. 우리 민족은 구석기 시대 이후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거주해 왔다. 고려시대부터 영토가 한반도에 제한돼 있었지만,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를 일궈 왔다. 동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이 그러하듯 농경생활이 기본을 이뤘고, 따라서 유목민이 아닌 정주민의 특징을 간직해 왔다. 어떤 이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심성을 ‘한(恨)’에서, 다른 이는 ‘은근과 끈기’에서 찾기도 했다.

서재에 서 있는 황순원 작가. 그는 한국인의 정서를 '한'이 아니라 '유랑민 정서'에서 찾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재에 서 있는 황순원 작가. 그는 한국인의 정서를 '한'이 아니라 '유랑민 정서'에서 찾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황순원의 답변은 이와 다르다. ‘움직이는 성’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그가 주목하는 한국인의 심성은 ‘유랑민 근성’이다.

“그건 정착성이 없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말하자면 우리 민족이 북방에서 흘러들어올 때 지니구 있었던 유랑민 근성을 버리지 못한 데서 오는 게 아닐까. 우리 민족이 반도에 자리를 잡구 나서두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적으루나 정신적으루 정착해 본 일이 있어? 물론 다른 민족두 처음부터 한곳에 정착된 건 아니지만 말야.”

이렇듯 황순원은 한국인의 심성을 ‘유랑민 의식’에서 찾았다. ‘움직이는 성’은 각각 개성이 다른 세 명의 주인공인 농업기사 준태, 목사 성호, 민속학자 민구가 펼치는 삶과 생각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을 통해 황순원은 한국인의 종교적 삶을 다각도로 조명함으로써 기독교와 샤머니즘, 구체적 삶과 추상적 관념, 욕망과 도덕 사이에서 새로운 구원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진정한 작가나 시인이 자기는 문예사조의 어느 주의를 신봉한다든가 무슨 주의자라고 자처하는 걸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예술가가 정말로 자신을 어떤 틀 속에 옹색하게 가둘 리가 없다는 걸 믿기 때문이다.”

칠순을 맞이해 황순원이 쓴 에세이 ‘말과 삶과 자유’의 한 구절이다. 황순원은 예술가의 자유를 소중히 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자유를 얻기 위해 월남했고, 이후 어떤 유파나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도달한 ‘유랑민 의식’에 대한 인식은 황순원 자신의 삶을 반영한다. 유랑민의 본질에는 그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유인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황순원은 앞서 말했듯 ‘겨레의 기억’을 소설로 남겨두려고 했다. 만주로 떠난 남편의 편지를 받아 든 ‘기러기’의 쇳네, 주인 없는 개 신둥이를 돌보는 ‘목넘이마을의 개’의 간난이 할아버지, 폭풍으로 석이가 죽은 바다로 나가는 ‘잃어버린 사람들’의 순이, 그리고 ‘움직이는 성’의 주인공들을 통해 황순원은 지난 100년 동안 겨레의 삶을 재현하고 증거하고 또 성찰하게 한다. 그를 우리 현대사에서 뛰어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내가 꼽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피란민에서 유목민으로 

사회학자에게 부여된 일차적 과제는 자기 사회에 대한 분석이다. 이러한 분석은 흔히 이름 짓기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미국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후기산업사회’로, 영국 사회학자 마틴 앨브로는 ‘세계사회’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로 자기 사회를 포함한 현대사회를 명명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미우라 아쓰시는 일본사회를 중산층이 붕괴한 ‘하류사회’로 파악했다.

‘움직이는 성’에서 황순원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빌리면 한국사회는 ‘유랑민사회’로 볼 수 있다. 이 유랑민사회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먼저 그늘을 주목하면, 그것은 유랑민사회에 내재한 피란민의 정체성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잠시 머물러 있는 공간이기에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삶을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 생각하는 게 피란민의 자의식이다.

황순원 전집으로 정리되어 나온 '움직이는 성'.
황순원 전집으로 정리되어 나온 '움직이는 성'.

한국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피란민처럼 살아가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지 않을까. 한번 훼손된 공동체 의식을 복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선 명시적 규칙과 묵시적 규범을 준수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규칙도, 규범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존재하는 게 한국사회의 자화상인 것처럼 보인다.

유랑민의 빛을 이루는 것은 유목민의 정체성이다.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가 강조하듯, 유목민은 세계화된 정보사회에 어울리는 새로운 인간형이다. 변화하는 현실에 걸맞은 능동성과 창의성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는 게 유목민의 정체성이다. 새롭게 열리는 미래 100년에서 피란민의 정체성과 결별하고 유목민의 정체성을 내면화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부여된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조희연의 ‘투 트랙 민주주의’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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