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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사고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면

입력
2018.10.1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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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 경기 고양경찰서에서 경찰 관계자가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관련된 풍등과 동일한 제품을 공개하고 있다. 앞서 7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대한송유관공사 고양저유소에서 풍등에 남아있던 잔불이 원인이 된 화재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연합뉴스
9일 오전 경기 고양경찰서에서 경찰 관계자가 고양 저유소 화재사건과 관련된 풍등과 동일한 제품을 공개하고 있다. 앞서 7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대한송유관공사 고양저유소에서 풍등에 남아있던 잔불이 원인이 된 화재폭발사고가 발생했다. 연합뉴스

인도에 심어진 가로수가 강풍에 쓰러지면서 어린 아이가 타고 있던 유모차를 덮쳐 아이가 숨졌다. 단순 사고로 보이는 사건이지만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다음 중 누구일까.

의사 A는 당시 응급처치가 필요한 아이를 싣고 병원으로 찾아온 구급차를 돌려보냈다. 자신이 외과 담당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관청에서 청소용역을 의뢰받은 업자 B는 결벽증이 심해 노후한 가로수의 상태를 점검하는 데 소홀했다. 가로수 아래에 개똥이 떨어져 있어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다. 공무원 C는 사고 가로수에 떨어진 개똥을 치워달라는 민원 전화를 묵살했다. 개똥이나 치우기 위해 어려운 공무원 시험을 통과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개와 함께 산책하다 가로수에 똥을 뉘게 한 뒤 뒤처리하지 않은 시민 D도 개똥과 가로수가 쓰러진 것은 직접적인 인과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작가 누쿠이 도쿠로의 소설 ‘난반사’는 이처럼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소홀함과 나태가 얼마나 허망하고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지 경고한다. 단순 사고로 보이는 이 사건은 ‘설마’ ‘이쯤이야’ 하는 우리 일상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들이 거듭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딱히 누구의 잘못을 단정할 수 없지만, 누구 한 명이라도 자신의 책임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한 아이의 소중한 생명을 잃는 일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최근 발생한 경기 고양저유소 화재 사고도 이 소설이 우려한 사소한 나태와 소홀함이 빚어낸 인재라고 봐야 할 게다. 그럼에도 사고의 책임을 물어 사법적 처벌을 내릴 대상을 적시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사고 직후 경찰이 현장 폐쇄회로(CC)TV를 분석해 인근을 지나던 스리랑카인이 풍등을 날린 사실을 밝혀내고 긴급 체포했으나 이내 풀어줬다. 과도한 처분이라는 여론을 의식한 것도 있지만, 현재의 형사법 시스템 내에서 유죄판결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분명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 ‘이런 일만 없었다면’이라는 가설이 여럿 존재한다. 사고 전일 인근 학교에서 화재 위험성 논란이 있는 풍등 축제를 하지 않았더라면, 점화 10분 이내에 연소되는 정품 풍등만 사용했더라면, 이튿날 그 스리랑카인이 바닥에 떨어진 풍등을 날리지만 않았더라면, 저유탱크 인근에 잔디가 없었더라면, 저유소 관리 직원이 좀더 일찍 화재를 알아차렸더라면…

어느 단계에서만이라도 감지망이 작동됐더라면. 혹은 만에 하나 있을 지 모르는 안전사고를 의식하고 행동을 자제하거나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번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후 경찰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봐야겠지만 현재까지 경찰수사로서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특정인을 사법처리하기란 쉽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그렇다고 이번 사고를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결론 내린 채 덮을 수는 없다. 결국 해답은 우리 사회의 안전망과 시스템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국정감사를 통해 고양저유소의 안전불감증이 다수 지적됐다. 소방청 국감에서 이번 화재 사고의 결정적 원인으로 추정되는 인화방지망 이상유무를 셀프 점검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사자들은 이번 사고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부인할 지 모르지만 결코 무관하다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만든 안전매뉴얼로 급변하는 작금의 상황을 모두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풍등은 물론, 지금은 지천에 널린 드론이 향후 안전 시설을 위협할 수단이 될 수 있음은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양저유소 사고가 휘발유 저장고 탱크 1개가 전소하는 데서 끝나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보다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 대비하는 선제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 이는 비단 고양저유소에 국한된 게 아닌 우리 국민의 생명에 위험을 줄 수 있는 모든 안전 시설에 공통적으로 적용해야 할 사안이기도 하다.

한창만 지역사회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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