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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처도 선하게 쓰일 수 있다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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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처도 선하게 쓰일 수 있다고 믿어요"

입력
2018.10.17 04:4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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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추상미가 감독으로 변신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부친인 전설적인 연극배우 고 추송웅씨가 영화 팬이었다고 한다. 추 감독은 “아버지가 다시 태어나면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며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뤘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커넥트픽쳐스 제공
배우 추상미가 감독으로 변신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부친인 전설적인 연극배우 고 추송웅씨가 영화 팬이었다고 한다. 추 감독은 “아버지가 다시 태어나면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며 “아버지의 꿈을 대신 이뤘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커넥트픽쳐스 제공

1994년 연극 ‘로리타’로 데뷔해 20년 넘게 배우로 살았는데 어느새 감독이란 호칭이 자연스러워졌다. 단편영화 ‘분장실’(2010)과 ‘영향 아래의 여자’(2013)에서 범상치 않은 연출력을 보여 준 추상미(45) 감독이 첫 장편영화를 내놓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부문에서 상영돼 전석 매진된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31일 개봉)이다.

쌀쌀맞은 분위기로 영화 관계자들 사이에 악명이 높은 언론시사회에서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16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마주한 추 감독은 “관객이 조금만 몸을 들썩거려도 ‘영화가 별로인가’ 걱정되는 게 감독의 마음인 것 같다”면서 그제야 긴장이 다소 누그러진 듯 살며시 웃음을 지었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폴란드로 위탁 교육을 보낸 전쟁고아 1,500명과 이들을 8년간 부모처럼 돌본 폴란드 교사들의 실화를 다룬다. 이들의 이야기는 폴란드 언론인 욜란타 크리소바타가 우연히 한 공동묘지에서 김귀덕이란 묘비명을 발견하고 그 사연을 추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2006년 폴란드 공영방송 TVP가 다큐멘터리로 방영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2013년엔 실화 소설 ‘천사의 날개’도 출간됐다. 몇 년 전 대학 후배가 일하는 출판사를 찾았다가 이 소설을 보게 된 추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2011년 아들을 얻은 뒤 산후우울증을 겪던 중 우연히 본 북한 꽃제비 다큐멘터리도 그가 이 이야기에 빠져든 모티브가 됐다.

폴란드 프와코비체 양육원에서 생활하던 북한 전쟁고아들은 마을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커넥트픽쳐스 제공
폴란드 프와코비체 양육원에서 생활하던 북한 전쟁고아들은 마을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커넥트픽쳐스 제공
북한 전쟁고아들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눈물 짓는 폴란드 교사. 커넥트픽쳐스 제공
북한 전쟁고아들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눈물 짓는 폴란드 교사. 커넥트픽쳐스 제공

‘폴란드로 간 아이들’은 추 감독이 극영화 ‘그루터기들’을 준비하면서 폴란드에서 만난 교사들의 증언과 현지 취재 과정을 담고 있다. ‘그루터기들’에 캐스팅된 탈북민 출신 배우 지망생 이송씨가 동행했다.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이들을 그리워한 폴란드 교사들은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전해달라”면서 눈시울을 적셨고, 북한에서 온 이송씨를 따뜻하게 안아 줬다. “송이와 함께한 덕분에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분단의 현재성과 연결되는 작품이 완성된 것 같아요. 송이도 폴란드 교사들을 만나고 많이 울었어요. 비로소 자신의 상처와 대면할 용기를 내더군요. 영화를 편집하면서 보니 저와 송이도 폴란드 교사와 전쟁고아들 같은 관계가 돼 있었어요.”

폴란드도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겪었다. 폴란드 교사들이 북한 전쟁고아에게 느낀 감정은 동질감과 연민이었다. 추 감독은 “상처의 연대”라고 표현했다. “폴란드 교사들이 개인의 상처와 역사의 상처를 다른 이들을 품는 데 선하게 사용한 것처럼, 분단의 상처도 선하게 쓰일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1959년 북으로 돌아간 전쟁고아들은 어학 능력을 바탕으로 엘리트로 성장했다. 영화에는 후일담이 담기지 않았지만,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 공개된 뒤 기적 같은 소식들이 추 감독에게 전해지고 있다. 부산영화제 상영회에 온 한 관객은 ‘자신이 탈북민이고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이 폴란드에 갔던 전쟁고아였다’면서 선생님 사진을 가져왔다. 15일 시사회에 지인 초대로 왔던 한 탈북민 자매는 ‘아버지가 폴란드에 갔던 전쟁고아’라는 고백을 들려 줬다. 추 감독은 “조만간 그분들께 자세한 사연을 듣기로 했다”면서 뭉클한 표정을 지었다.

폴란드 교사들의 추억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는 추상미 감독. 커넥트픽쳐스 제공
폴란드 교사들의 추억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는 추상미 감독. 커넥트픽쳐스 제공

추 감독은 2009년 SBS 드라마 ‘시티홀’을 끝으로 연기 활동을 멈추고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에 진학해 연출을 전공했다. 당분간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영화 연출에 전념할 계획이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마치고 ‘그루터기들’ 시나리오 수정 작업도 하고 있다. “감독으로 살아가는 삶이 저에게 의미가 있어요. 세상과 소통하면서 사회적 이슈에도 더 민감해지게 되고, 타인에 대한 관심도 커집니다. 우리 시대에 문화예술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삶이 만족스럽습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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