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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노벨상 연가

입력
2018.10.16 13:39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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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시월에도 이웃나라 일본은 노벨상을 챙겼다. 한국연구재단은 노벨상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 한국인 과학자 6명이 이미 노벨상 수준의 성과를 냈다고 발표해 한국인 최초의 노벨과학상 수상 기대감을 높였으나 결과는 예년과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논문 수나 피인용 횟수 등으로만 따진 추정이라 노벨상 수상의 최소요건이라는 의미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언론에서는 해마다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흘러나왔다. 기초분야에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우리는 응용분야에만 집중해왔다, 게다가 역사도 아주 짧다 등등 언제 들어도 옳은 모범답안 같은 얘기들이 잠시 떠돌다가 이내 사라졌다. 수상자를 발표한 지 열흘 남짓 지난 지금까지 노벨상 미수상을 아쉬워하며 한국의 기초과학을 걱정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또한 예년과 다르지 않다.

다른 점도 있다. 물리학 분야의 경우 20여 년 전과 비교하면 노벨상 수상이 유력하다는 후보들의 면면이 확 바뀌었다. 정말로 수상이 유력한 후보였다면 세월이 지날수록 수상 가능성이 더 높아져야 할 것 같은데(일본은 그러했다.), 현실은 정반대였다. 지금 거론되는 후보들은 부디 시간이 흐를수록 수상 가능성이 높아지길 바란다.

그런데 어떤 후보들은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외국에서 주로 연구한 성과로 큰 업적을 남겼다. 이런 경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한국인의 우수함을 증명한, 또는 우리도 하면 된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사례 정도의 의미는 있을 것이다.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아직 한 명도 없는 우리 처지에서는 이마저도 대단한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노벨상을 타거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를 배출하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함이고, 이를 통해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 자연과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 지성의 지평을 넓혀온 누천년의 과업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제반 환경에 대한 자주적인 통찰력을 나는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인류 문명을 지금까지 이끌어 온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다. 북한이 문명국가를 건설하겠다면서 과학입국을 기치로 내건 것은 대단히 올바른 선택이다. 노벨상은 문명화 과정에 따라오는 부산물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한국인이 받은 노벨상’보다 ‘한국에서 받은 노벨상’의 의미가 더 크다. 이와 같은 취지의 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10년쯤 전에는 세계수준의 연구중심 대학을 만들겠다는 정부사업(World Class University, WCU)을 시작하기도 했었다. 세계수준의 대학을 만들겠다니 누가 반대하겠냐마는, 대학의 체질개선을 지나치게 해외 석학 유치에만 의존한 탓에 WCU가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래도 정부의 주무부처가 대학이 학문연구의 중심으로 서야 한다고 인식했다는 것 자체는 불행 중 다행이다.

이런 인식이 오래 가지는 못한 것 같다. 똑같은 정부부처에서 최근 사회수요를 충족할 산업연계 선도대학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공학계열 정원을 대폭 늘리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 사업의 근거가 된 ‘2014~2024년 대학 전공별 인력수급전망’이 얼마나 믿을만한 자료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대학의 존재이유가 기업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싸구려 졸업생’을 배출하기 위함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남는다. 이 사업만 놓고 보자면 교육부는 그토록 오매불망이었던 노벨과학상의 꿈을 포기한 것 같다. 세금을 꼭 써야 한다면 돈 많은 기업을 위한 일보다는 정부지원 없이는 고사할 수밖에 없는 기초학문을 살리는 일에 써야 하지 않을까? 등산객을 위협하거나 농작물에 피해를 줄 수도 있는 반달가슴곰을 정부가 돈을 들여 보호하는 이유는 생물 다양성 확보라는 가치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학문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모든 대학에서 기초과학을 연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최소한의 자생력을 가질 만큼의 역량은 확보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 이 점에서만큼은 과학입국으로 문명국가를 만들겠다는 북한을 본받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과학자들의 연구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자를 길러내고 일차적인 연구를 수행하는 대학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부실해 보인다. 최근 교육부 장관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우리 대학의 위상과 앞날을 두고 사회적인 논의를 활발히 하지 못했던 점이 무척 아쉽다.

시월마다 노벨상 타령하는 언론사도 수상자 배출을 위해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대학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학평가 항목에서 기초과학 관련 지표를 신설하는 것이다. 애매하고 주관적인 사회 평판 같은 항목보다야 예컨대 물리학과 교수 숫자가 훨씬 더 객관적이면서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솔직한 마음은 이따위 순위놀음 하는 대신에 과학기사를 하나라도 더 충실하게 써 줬으면 좋겠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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