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네이선 렌츠 ‘우리 몸 오류 보고서’

인간의 진화를 나타내는 그림.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부심의 표현이다. 그 대신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네이선 렌츠의 포인트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래, 생각해 보니 이것도 꽤 괜찮은 접근법이겠다.

우리는 우리가 인간이기에 ‘인간의 최우선성’에 대한 이야기들에 거부감이 없다. 거부감은커녕 중증 수준의 자기 연민, 자기애에 잠겨 있곤 한다. 인간이란 신의 형상을 따서 만든 고귀한 피조물이라는 창조론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매력적인 이유다. 당신이 사랑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니, 거참 오글대면서도 은근 좋지 않은가.

창조론의 대척점에 서 있을 것 같은 진화론도 매한가지다. 창조를 부정하고 ‘진화계통도’를 그리지만, 그 계통도는 대개 우뚝 솟은 기둥을 중심에 둔 거대한 나무다. 나무의 가장 빛나는 성취가 열매이듯, 별먼지에 뿌리박고 있는 이 거대한 진화계통도 나무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는 인간이 있지 않겠느냐는, 무의식이 작동한다.

이런 오류를 교정하기 위해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제안한 것이 ‘관목’ 개념이다. 진화계통도는 나무이지만, 기둥 하나 우뚝 솟은 나무가 아니라 무엇이 주된 기둥이나 줄기인지 알 수 없이 풍성한 나무라는 것이다. ‘풍성’도 너무 고상하다. 때론 미친 듯 자라나 무엇이 어디에 가서 붙었는지도 모를 무성한 나무다. 관목에서 인간의 위치란, 나무 꼭대기의 열매가 아니라 어느 난삽한 덤불 귀퉁이에 있는 한 조각 잎사귀일 뿐이다.

창조론 혹은 지적설계론 혹은 여전히 자기애에 빠져 허우적대는 진화론을 깨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성적이며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이런저런 결함 덩어리인 희한한 존재’라는 점을 빨리 깨우치는 게 좋다. 우리 존재는 ‘신의 창조’, ‘아름다운 우주적 섭리’, ‘진화가 도달한 최정점’ 따위와 무관한, 어쩌다 얻어걸린 것들의 총합이다. 그걸 세세하게 설명해놓은 책이기에, 이름도 ‘우리 몸 오류보고서’다.

우리 몸 오류 보고서
네이선 렌츠 지음ㆍ노승영 옮김
까치 발행ㆍ304쪽ㆍ1만7,000원

“진화는 지속되는 과정이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진화와 적응은 육상 경기장을 달리는 것보다는 트레드밀 위를 달리는 것에 가깝다. 멸종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적응해야 하지만, 앞으로 나간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재미는 ‘못난 인간’에 대한수다에서 온다.

인간의 특징은 언어다. 의사소통을 위해 정교한 발음을 내려면 다른 동물들에 비해 후두가 올라와야 하고 목구멍이 좁아져야 한다. 그 덕에 말을 잘 하게 됐지만, 그 때문에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목에 뭔가 걸리면 쉽게 죽는다.

또 다른 특징 직립보행도 그렇다. 그 덕에 두뇌가 커졌지만, 그 때문에 무릎의 부담이 커지면서 전방십자인대 파열은 흔한 질병이 됐고, 아킬레스건을 뒤쪽에다 위험하게 노출해버렸다. 직립 부담이 허리로 간 것이 추간판 탈출, 곧 디스크다. 네발로 설계된 우리 몸이 두발 보행을 따라잡지 못해서 생긴, 그러니까 우리 몸이 덜 진화해서 생기는 일이다.

직립보행은 두뇌 발달 등을 낳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있다. 까치 제공

직립으로 뇌가 커지는데 부비동과 망막은 네발 시절에 설계됐다. 왜 그리 설계됐는지 대체 모르겠지만, 부비동이 코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면서 동물 중 유일하게 인간만이 잦은 코감기에 시달리고, 망막에 거꾸로 상이 맺히는 바람에 근시ㆍ원시에 맞춰 안경을 껴야 하는 존재가 됐다.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온갖 유전적 질병에 시달리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알루(Alu) 유전인자의 존재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알루 이 녀석은 무전 취식하는 동네 건달 같은 존재다. 여기저기 쏘다니다 주요 유전자에 교란을 일으켜 이상한 질병들을 낳는다. 더 놀라운 건 알루 유전인자 같은 것이 인간 DNA의 45%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중나선의 절반 가까이가 “쓸데 없는 헛소리”들로 채워져 있는 셈이다.

발목이 잘 삐는가.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다. 우리 발엔 쓸데 없이 많은 뼈가 있어서다. 진화가 덜 된 탓이다. 까치 제공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반전이 있다. 이 알루라는 놈이 3,000만년 전쯤 시각 부분을 슬쩍 건드린 모양이다. 그 덕에 인간 계열의 조상은 다른 동물에 비해 색을 더 풍부하게 느낄 수 있게 됐다. 색을 더 잘 느끼는 건 당장 숲 속에서 잘 익은 과일을 더 빨리 찾아 먹고, 위험한 짐승을 피하도록 도왔다. 시각적 우위라는 인간의 특징이 생긴 셈이다. 내내 행패 부리고 다니다 어쩌다 한번 의도치 않게 좋은 일을 해버린 알루야말로 “진화의 묘미”다.

인간은 진화의, 자연의 최선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강해진 뒤에 어두운 면을 가지게” 된 다스베이더다. 역사 속, TV 속 흉악한 사건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사람이,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전율한다. 아니다. 사람이니까, 인간이니까 능히 그럴 수 있다. “한없는 사랑과 위대한 자기 희생”과 “냉혹한 살인과 집단 살해”는 같은 이야기의 다른 버전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미래, 곧 번영이냐 자멸이냐 또한 그렇다.

이 책을 쓴다고 하자 저자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단다. “드디어 네가 잘 아는 주제를 찾았구나!” 까치가 낸 과학서 중 매우 재밌고 대중적이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화 최신기사